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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굳이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라는 유행가를 듣지 않아도 가을은 사랑의 계절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에는 젊은 남녀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내 나이 스물이었을 때 나도 손을 잡고 밝은 모습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거리를 거닐었다.
그런데 내 나이 서른이 넘어가자 그들의 모습이 부러워졌다. 나의 젊음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아서. 이제 그런 모습을 나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아서.
마흔이 지난 지금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내가 소유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일까?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 때처럼 그런 모습으로 아내와 함께 하질 못한다. 이제 길을 거닐 때 아내와 손을 잡고 거니는 것이 어색하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마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때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며칠 전 아내와 다투었다. 다툰 뒤 아내는 품에 안기며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못 들은 척 하니 다시 한 번 더 그 말을 한다. 그 때 내가 한 말,
"벌써 마음속으로 두 번이나 했다."
그렇게 넘어갔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그것도 마흔을 훌쩍 넘어서다보니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재미없는 사람이다.
가을이다. 마흔 다섯 번째 맞는 가을이다. 이제 삶을 되돌아보아야 할 시간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읽은 박경리의 <토지>가 생각이 난다. <토지>를 읽고 난 뒤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어댄다. 얼마 후 그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가만히,"
이불 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토지> 2부 중에서-
나는 이 장면이 토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 생각한다.
월선이가 숨을 거두기 직전 용이가 찾아온다.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대화이다. 그들의 사랑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이 몇 마디 말속에 한 평생 어긋난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깊은 사랑이 다 녹아 있다.
아내와 나는 용이와 월선이처럼 서로 주위를 맴도는 안타까운 사랑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늘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런데 그만 그 사랑을 얼마 동안 잊고 있었다.
잊었던 그 사랑을 다시 찾아야겠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웃음으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아내가 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에 흥미를 보여야겠다. 아내가 하는 세상살이 이야기를 웃으며 맞장구 쳐 주어야지. 그리고 나도 세상사는 이야기를 많이 해야지. 그것으로 아내는 기뻐할 것이다.
이제 아내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감싸주며 사랑을 채워가고 싶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날 우리 함께 살면서 여한이 없는 깊은 사랑을 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월선이와 용이의 사랑을 다시 한번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깊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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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마로니에북스][완간판]New 박경리 대하소설토지[20권+토지인물사전]
, 마로니에북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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