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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
10월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다. 가을걷이를 앞둔 농부처럼 내 마음은 분주해진다. 그러나 그 분주함은 수확의 기쁨과는 거리가 멀다. 풍년가 속에서도 정부의 추곡수매가가 형편없어 농부들의 얼굴엔 시름이 깊고, 이런저런 글들은 많이 썼지만 제대로 된 시 작품은 하나도 쓰지 못한 시인지망생의 얼굴엔 수심이 깊다.

곧 다가올 신춘문예 마감을 의식하며 한 해 동안 써놓은 시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중에서 나은 작품 몇몇을 골라 떨리는 마음으로 응모하곤 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기대는 크리스마스를 지나면서 여지없이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변하곤 했다.

스물세 살 무렵부터 계속된 나의 이러한 신춘문예병은, 정말 쓸만한 작품이 없어 응모를 포기했던 서너 해를 제외하고는 지난해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올해 마흔이 되면서 나는 자신을 가엾게 만드는 이 헛수고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도 10월이 다 끝나가고 있는 지금, 변변찮은 시들에 다시 눈길을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렇다. 마흔이 되었어도 '시인'은 여전히 내가 꾸고 있는 꿈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나의 꿈에 속해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돈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때 만난 한 시인의 시집은 나의 꿈을 시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신대철 시인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이 시집에서 만난 시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 이게 정말 시로구나. 나는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시인의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집을 읽고 나서부터, 지금 나의 아내가 된 그녀와 연애하듯 나는 시와 연애에 빠져들었다.

시인은 나의 꿈이 되었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그 꿈을 안고서, 지난 며칠간 나는 <무인도를 위하여>를 다시 읽었다. 밑줄 쳐 놓은 시행들이 오래된 연애의 추억처럼 내 눈길에 걸렸다. 그 시행들에 걸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서 걷는 동안 10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2.

1977년에 펴낸 신대철의 <무인도를 위하여>는 그 제목과는 달리 '산'에 관한 시집이다. 이보다 더 풍요롭게 산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집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집은 산을 오르듯 그렇게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천천히 읽어나가야 한다.

이 산행에서 우리는 '오랑캐꽃 피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놓고 꿈속같이 잠들어'(17쪽, '그는 뒤에서') 있는 산짐승들도 만나고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 톡 꽃망울이 터진 노루발풀'(24쪽, '自然')과 같은 식물들도 만난다.

그러나 시인은 무엇보다도 이 산 속에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시인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無名氏,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27쪽, '사람이 그리운 날 1')이거나 또는 '실성한 사람'(28쪽, '사람이 그리운 날 2')이다.

그런데 '이름'이라는 근대적 호명방식과 '이성'이라는 근대적 사유방식을 벗어나 있는 이런 사람은 시인 자신이 꿈꾸고 있는 자연인(自然人)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인은 스스로 '식물이 생길 때의 첫 소리를 닮은 얼굴'(31쪽, '處刑 1')을 지닌 남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칡덩굴이 잡나무들을 휘어감고 올라와 기웃,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칠 때마다 꽃 하나씩을 피워'(19쪽, '山 사람 2') 내던 평화로운 유년시절은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를 피해 날아가는 山비둘기떼'(50쪽, '가을의 소리')처럼 이제 어른이 된 시인을 산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다.

젊었을 때 실제로 10년 가까이 칠갑산에서 움막을 짓고 산속생활을 하기도 했던 신대철 시인이지만, 남들처럼 군대를 다녀오고 생활인으로서 근대적 사회구조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산 아래 마을에 살도록 '처형'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산한 그는 다시 자연 친화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바다라는 공간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잠을 통하여 훼손당하지 않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 역시 그 출발은 산이다.

산속을 흐르는 개울물에 누웠을 때 자신의 '살이 푸르러지'고 '가슴께 비늘이 만져'지는(25쪽, '아무도 살지 않는 땅 1') 것 같은 자연과의 깊은 일체감을 경험한 시인은 물에 주목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물의 끝인 바다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것은 '일생을 숨어 살아온 者가 숨어 들어 깨끗이 꿈 속을 비우거나 꿈의 위치를 바꿔 놓습니다, 바다 쪽으로'(63쪽, '망초꽃 2')라는 시행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바다에서 발견한 무인도에서, 시인은 다시 야생의 삶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소망한다. 이러한 시인의 소망은 '다시 無人島를 위하여'라는 아름다운 시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맑다, 아무도 살지 않은 시간, 섬의 별이란 별은 하늘로 전부 올라가 있는 시간, 그는 無人島 한복판으로 바람 부는 대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우뚝 서서 그를 인간이게 하는 겉껍질을 깎는다, 깎을수록 투명한 하나의 돛이 될 때까지.(72~73쪽)

한편,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새들은 높은 나뭇가지 끝 아득한 높이에 떠 있는 새집으로 그의 시선을 이끈다. '정 붙일 땅이 없어' 산속을 헤매던 그는 나무 아래에서 새집을 올려다보며 '저 새집 속이 낫지 않을까?'(48쪽, '感情 1, 感情 2')라고 생각한다.

그는 뭉게구름이나 새털구름이 잠시 머물다 가기도 하는 그 새집에서 잠들고 싶어한다. 그 잠은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꿈을 꾸기 위한 것이다. 군대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쓰여진 시 '우리들의 땅'에는 이러한 시인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잠을 좀 자야한다. 총을 휴대한 사람들에겐 꿈이 차례가 오지 않는 잠, 며칠째 개꿈도 들지 않는다. 신경만 뿌릴 잡는다. 물차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 담배 한 대, 자기 매질, 무조건 용서, 무조건 체념, 꿈이 갖고 싶다.(57쪽)

그가 갖고 싶어하는 꿈이란 다름 아닌, '풀잎 꿈 속에 꼬부려 누워' 잠이 든 소년, 즉 유년시절의 시인이 산속 풀잎에 누워 잠들었을 때 꾸었던 바로 그 꿈이다. '이글이글이글 풀잎 꿈 속에서 소년의 꿈 속으로 불덩이가 넘어'가는(21쪽, '自然') 그 꿈을 꾸기 위해서 잠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카시아 나무 꼭대기에 지어진 까치집을 오래도록 바라다보며 '저 까치집에 날아들어 밀리고 밀린 잠을 자고 싶다. 그리고 인간으로 깨어나 다시 인간에게 <미래의 말>을 걸고 싶다' (7쪽, '自序')라고 말한다.

시인이 잠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건넬 꿈의 이야기는 '미래'의 말이겠지만 그것은 평화롭게 자연과 교감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미래 기억자'라는 역설적인(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한다는 점에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해질 무렵이 되면 나는 아무 데라도 가고 싶다. 날고 싶은 대로 다 날아버린 날개를 달고 이 세상에 오래 살아 본 미래 기억자가 되어 돌아오고 싶다. 이낀 낀 나무 위의 동네에 집 하나 지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오고 싶다.(뒤표지'시인의 말')

자연 친화를 꿈꾸며 시인이 시도하는, 바다와 잠 또는 무인도와 유년이라는 이 두 가지 방식은 자칫 '은둔'이나 '퇴영'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돛이 되어, 그리고 미래 기억자가 되어 돌아오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읽는 순간, 우리는 그런 부정적인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 시집을 상재하고 나서 12년이 지나서야 <나무 위의 동네>라는 산문집을 냈고, 그러고 나서 또 11년이 지난 2000년에야 두 번째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를 출간했으니 말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람까지도 친화의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 산문집과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서 그가 소망했던 것이 '은둔'이나 '퇴영'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

첫 시집에서 소망했던 것을 두 번째 시집에서 펼쳐 보이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묵묵히 견디어낸 신대철 시인의 자세에 비하면, 매년 10월이 되어서야 시를 앓는, 그것도 한철일 뿐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나의 자세는 너무나 가벼워 보인다.

청춘 시절 내게 시인을 꿈꾸게 했던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를, 아직도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마흔 살의 나이에 다시 읽어보니, 시인이라는 이름이 어쩌다가 운이 좋아 얻게 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이름은 얻지 못했어도, 나는 지금도 나무 위 아스라한 높이에 있는 까치집을 보게 되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까치집으로 날아 들어가, 오래 기억되는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낳고 싶다.

무인도를 위하여

신대철 지음, 문학과지성사(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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