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의 공식 목적은 제7차 세계국가인권기구 대회와 유엔 주최의 모범적 공치(good governance) 국제회의 참석. 지난 7월 1일 업무를 시작한 이래 첫 개별 방문한 국가가 한국인 셈이다.
3박 4일의 방한 일정 중 아버 판무관은 두 국제회의 참석 이 외에도 한국 정부 관계자와 국내외 인권단체 대표와 인권 피해자를 두루 만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방한한 9월 중순은 한국사회가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 한국 정부, 언론 및 인권단체는 아버 판무관이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에 어떤 입장을 피력할 것인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목했다.
마치 긴장 속에 솔로몬의 판결을 기다리는 분위기랄까. 아버 판무관은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를 감지한 듯, 방한 내내 국가보안법에 대해 직접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전 유엔 구유고 및 르완다 국제 전쟁범죄 재판소 수석 검사와 캐나다의 대법원 판사 경험을 통해 몸에 밴 신중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첫 국가 방문에 대한 부담감도 엿보였다.
아버 판무관은 국내 인권단체 및 인권 피해자와 만나기도 했다. 출국 전날 오후 늦게 마련된 이 모임을 시작하면서 아버 판무관은 “이 만남이 자신의 방한 일정 가운데 하이라이트”라며 큰 가치를 부여했다. 이에 고무받은 참석자들은 대화 중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분명한 발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대화에서는 국가보안법, 양심(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외국인 노동자, 일본군 종군위안부(정신대) 등 한국사회의 주요 인권문제에 대한 피해자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증언을 듣고 나서 “앞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는 정부 관계자보다 인권단체와 피해자를 먼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웠다”며 우회적으로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공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없었다. 많은 참가자의 얼굴에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일 오전이면 한국을 떠난다는데….
이제 마지막 기회는 출국 직전 예정된 김창국 한국 국가인권위 위원장과의 인권 대담과 외교부 주최의 기자회견. 마침 인권 대담에 통역으로 배석한 필자는 아버 판무관으로부터 국가보안법에 대한 분명한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absolutely clear”란 강한 표현을 쓰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고 말했다. 마치 가두어 두었던 봇물이 터지듯 아버 판무관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유엔의 입장을 논리 정연하게 설명했다.
아버 판무관은 그동안 유엔 인권기구가 한국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한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국가보안법이 지금까지 존속한 것 자체가 오히려 의아하다”고까지 말했다. 한마디로 아버 판무관 주장의 핵심은 국가보안법 폐지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이자 ‘한국이 가입한 국제인권조약에 따른 의무’라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필자는 검사의 간명한 논거와 대법관의 예리한 판단력이 적절히 배합된 준비된 답변을 들으면서 역시 ‘세계 인권의 파수꾼’으로서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지닌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 판무관의 발언은 국내의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으로 전락하고 있던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다. 국가보안법 폐지야말로 인권 분야에서 ‘지구적 기준(Global standard)’에 맞게 한국사회의 인권 수준을 질적으로 높이는 ‘선진화’의 핵심과제라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을 놓고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 이라크 전쟁은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명분으로 주권국가를 침공한 사건이다.
아버 여사는 제4대 인권고등판무관이다. 2003년 8월 이라크에서 테러공격으로 순직한 서지오 드 멜로 제3대 판무관 후임이다. 제2대 판무관인 메리 로빈슨 판무관은 지금의 국가보안법 논쟁처럼 치열하고 팽팽하게 전개되었던 1999년 국가인권위 설립 논쟁 와중에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법무부와 민간단체가 팽팽하게 대립하던 상황에서 로빈슨 판무관은 민간단체의 법안이 국제인권기준에 더 부합한다며 민간단체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교롭게도 두 여성 인권고등판무관은 한국사회가 인권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는 와중에 한국을 방문했다. 로빈슨 판무관이 그러했듯이 이제 아버 판무관은 제네바에서 한국의 국가보안법 논쟁을 주시하고 있다.
‘인권에 국경이 없다’는 말처럼 이제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국제사회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국제사회는 지금 과연 한국이 국제인권기준과 유엔의 권고에 따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또 다른 ‘모범사례’를 만들어 낼지 그리고‘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지키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를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