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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수 시사만화방] sisacartoon.wo.to
[최인수 시사만화방] sisacartoon.wo.to ⓒ 최인수
한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점찍어둔 보이스 레코더를 열심히 입찰하고 있다.

이 순간을 위해 지난 며칠간 얼마나 열심히 '지식검색'을 했던가. 어느 제품이 성능이 좋은지, 어디가 저렴한지를 말이다. 한 번 몰두하면 끝을 보는 성격에 그것들을 죄다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온다.

다음날, 아예 온오프라인 가격비교를 해주는 곳을 뒤지는 재미에 혹해 이것저것 살펴보다 '이거다' 싶은 걸 찾았다. 그런데, 웬걸. '가격비교 해주는 곳'들끼리 다시 가격비교 해주는 곳도 찾아냈다.

여기저기 회원가입을 해뒀더니, 여기저기서 '아이디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물어댄다. 결정을 못 내리고 이래저래 날을 보내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보다보니 쓸데없이 눈만 높아진다.

요즘 MP3플레이어는 녹음기능도 있다. 생각해 보니 '솔깃'하다. 애초의 구입 목적은 음악감상이 아니라 자료기록과 아이디어 저장을 위한 것이었건만, 결국은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하나를 택했고, 낙찰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내가 낙찰 받은 물건이 훨씬 헐값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제 산 다홍치마보다 더 예쁜 다홍치마는 반드시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걸 또 어딘가에서는 더 싸게 팔고 있다. '이왕이면'이란 말에 끝은 없다. 이 진리에 부합하듯, 세상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기술'은 너무 신속하게 진보하고, '유행'은 너무 빈번하게 교체되며, '미디어'는 노골적으로 이를 부추긴다. 부유한 '얼리어답터'라면 상관없겠지만 대다수의 소비자에게 이 사실은 거의 고문의 수준이다.

여긴 밥이 맛있더라, 저긴 옷이 싸더라, 거긴 서비스가 좋더라, 세상천지 먹고 입으러 가볼 곳들은 어찌나 많은지. 요즘 세상에 '맛집멋집' 정보 정도는 줄줄 꿰지 못하면 바보 될 분위기인데, 글쎄 인간 네비게이션이 아닌 이상 그것 참 난감한 노릇이고.

삐삐, 시티폰으로 버벅거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16화음 핸드폰은 어느새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코웨2 없으세요?'라느니 '댁의 화장실은 비데 쓰냐?'고 자꾸 물어대니 그게 없는 내가 비정상인 것 같고.

홈쇼핑에서는 오만가지 3종 세트가 저렴한 가격 3만8900원이라는데 없는 돈에 자꾸만 혹하고. 그녀가 주는 보너스를 받기 위해 '카드 보너스 점수로 그녀의 마음을 사라'며 등을 떠밀어대니 '보여줄 능력'이 없어서 기죽는다.

어제 최신 상품은 오늘의 재고품. 어제 제값 주고 산 물건은 오늘의 가을맞이 50% 세일품목. 그뿐인가. 잘만 찾아보면 이런저런 보너스 점수에, 포인트에, 마일리지, 할인쿠폰, 적립카드까지 득실득실거리니. 이거야 원, 눈치 빠르고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은 천날 만날 손해만 보고 살라는 것 같잖아!

참으로 고를 것도 많고, 고려할 것도 많은 세상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쇼핑하면서 '이거 얼마예요?'만큼 자주 하는 말이 바로 '더 둘러보고 올게요'가 된 게 아닐까. '우씨, 이거 혹시 지구인들의 결단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외계인의 음모가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하던 차에 문득 목이 말라 '배섞인 라빈스' 아이스크림 하나 먹어볼까 했더니, 아차, 여기는 메뉴가 무려 31가지다. 아니, 더 많다. '털푸덕' 이제, 좀 쉬고 싶다.

집에 돌아와 몸을 씻을 참에, 요즘 각광받는 반신욕이니 족욕이니 별의별 목욕요법들이 떠올라 이내 질려 고개를 내젓는다. 뜨끈한 온수에 몸을 담갔다. 손에 한가득 잡히는 뱃살이 고민이다. 이번엔 별의별 다이어트요법, 다이어트식품, 건강상식들을 스크랩해둔 자료가 생각났다. 어이구, 징글맞다. 다 내다버려 버릴까보다.

그러고 보면, 옛 시골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풍요로웠다. 황토를 맨발로 밟고, 냇물에 멱감고, 나물 뜯어먹다가, 장보러 읍내에 걸어서 다녀오고. 그게 다 요즘 새삼 유행하는 웰빙이다 싶은 생각이 드니 씨익 웃음이 나온다.

'자장면'과 '짬뽕'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도 매번 갈등이 되는데, 세상은 자꾸만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서 내놓고는 '더 좋은 걸 선택하라'한다. 글쎄, 메뉴가 많은 음식점은 맛이 없고, 갈래길이 많은 산에서는 길을 잃는 법이다. 선택의 폭이 넓으면, 다양함과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을 법도 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마디로 '기회비용의 기회비용'이다.

심사숙고할 게 많은 것도 골치다. 하나를 선택하고 제외된 나머지에 미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결국 '선택'이란, '포기'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러니 다양한 선택을 즐길 줄 아는 풍요로움, 자신이 선택한 것을 진득하게 받아들이는 주체성, 선택하느라 지나치게 힘들이지 않는 여유를 갖는 게 맘 편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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