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안개비가 내리는 보스턴에서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 지지자들이 하나 둘 우산을 꺼냈다. 몸도, 마음도 차갑게 식어가서 비를 맨몸으로 맞을 열기가 없다. 그리고 썰물이 빠지듯 서서히 인파가 줄어들고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양키스를 이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걸 누구나 느끼는 듯하다. 지도를 보면 레드 아메리카에 밀려나 블루 아메리카가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으로 빠질 것만 같다.
이제 미국은 완벽히 보수가 장악했다. 하원 상원 대법원 백악관 모든 권력기관이 확실히 공화당의 손에 들어갔다. 총성 없는 보수 쿠데타의 완결판이다. 일시적 반동이 아니라 장기 통치에 접어들게 됐다.
그것은 문화혁명이었다. 갤럽이 여론조사를 하면 응답자의 94%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 오다가 더이상 증가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백명중 여섯명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주 의회의 결의에 따라 교과서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나란히 가르치는 주들이 늘어난다. 다른 나라에서는 선거쟁점이 안 되는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낙태 허용 문제가 미국에서는 정당에 대한 태도를 좌우하는 큰 기준이 된다. 기독교신자들은 둘 다 반대한다. 동성애자들의 인권과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해 둘 다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민주당은 기독교신자들에 의해 비도덕적인 정당으로 몰린다.
그래서 미국에서 잘 사는 사람을 대변하는 공화당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민주당을 리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번 선거에서도 부시 진영이 품성의 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몰고 간 것은 도덕성에서는 공화당쪽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케리 후보가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가 말을 뒤집었다며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물고 늘어졌다. 미디어는 그의 말을 보도하고 정치광고는 그것을 증폭시킨다. 사람들은 전쟁의 부도덕성은 잊어버린다.
기독교와 보수의 결합은 태생적이다. 캘빈주의적 전통이 강한 미국 기독교의 대부분 교파는 재부의 축적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가난을 개인의 죄악으로 본다. 그러니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적 의제에 대해 침묵하고 개인주의적 보수의 논리를 합창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 복음주의 교파(evangelical church)는 대대적인 투표독려운동을 벌였다. 부시 대통령의 정치고문 칼 로브(Karl Rove)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성향의 젊은 대학생들이 투표에 많이 참여했다는 보도에 대해 복음주의 교파의 투표등록운동만 해도 그 표를 상쇄하고 남는다고 일갈했다.
그런 점을 이해하더라도 민주당의 패배를 외부적 요인으로만 돌릴 수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시 정권이 몰아붙이는 이라크 공격론에 대해 맞서 일어설 용기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당의 정체성도 확립하지 못했다. 그 동안 ‘중산층’ 신드롬에 빠져 누구의 이해를 대변해야 하는지 헷갈려했다. 못사는 백인들도 자신의 이해관계보다 종교관에 따라 투표한다. 신심이 깊은 탓도 있겠지만 이들을 흡인할 수 있는 민주당의 노선이나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루 아메리카는 민주당이 승리하는 아메리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의식주가 부족함이 없고 의료와 교육의 혜택을 골고루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뜻한다. 이번 선거로 그 사회의 도래가 더 요원했는지 속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은 희망을 찾아 나서고 싶다.
디트로이트의 독자 반응
“저도 detroit근처에서 한동안 살아본 경력(?) 이 있어서 참 반갑네요.
처음 다운타운 가 보면 다들 놀라죠.
아무, 현재 상황을 eminem의 8 mile이라는 영화에 비유해서 말했으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 거기서 도로이름 붙이는 방식이 특이하잖아요.
또 백인 주거지역의 편의점과, 다운타운 근처의 편의점 방탄유리 시설을 비교해 봤으면 그것도 재미있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잘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detroit 북부 한 30분 떨어진데서
살고 있어서, 과연 흑인들만으로 그 도시가 다시 성장하는 걸까? 하는 생각은 좀 드네요.
여하튼, 참 가을이 아름답고, 겨울에 지겹도록 눈만 오고,
좋은 친구 많이 만났고, 빈민가 흑인들 중 안전한 사람들 많이 만났고, 그런 기억들이 제겐 남아 있습니다.
한가지 딴지를 걸자면, 제겐(학생은 아니었고 돈벌러 갔었습니다) 미시간은 그전 플린트편에서 묘사했던 만큼 그렇게 흉칙하고 살기 힘든 그런 곳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삭막했지만, 나름대로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시리즈 디트로이트 편에 ‘음’이라는 독자가 붙인 의견이다. ‘옥돌’이라는 독자는 이런 글도 적었다.
“기자분도 저랑 비슷한 느낌을 느끼셨군요. 저는 작년에 김병현 선수가 나온다기에 디트로이트 시내에 있던 야구장에 갔다가 좀 충격 받았죠. 야구장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다 유리창이 깨져있고 일층은 철조망이 둘러져 있더랬죠.
포커스호프와도 봉사활동을 같이 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되고도 미래를 위해 직업훈련을 계속하던 그 이름도 가물가물한 저랑 동갑인 친구가 기억나는군요.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디트로이트가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자분께선 백인들이 메트로 디트로이트에서 디트로이트 도심의 흑인들이 뭐하나 노려보는 형국이라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흑인들이 뭐하나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백인들에게는 지엠 르네상스 타워같은 디트로이트에 떠있는 섬같은 건물들만이 디트로이트라고 할 수 있죠. 퇴근하면 자동차라는 배를 타고 디어본과 앤아버 같은 육지로 매일 귀환하는 생활을 하면서...”
영화와 에미넴 누가 더 리얼한가
이 글들은 잠시 스쳐가는 발걸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디트로이트의 깊은 구석을 드러내고 있다. 이중에서 ‘음’ 독자가 권한대로 <8 마일(8 mile)>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디트로이트를 넘어서는 리얼리티가 이 영화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 자체는 흑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랩 장르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백인 래퍼로 성장한 에미넴(Eminem)의 얘기라고 한다. 8마일은 흑인이 밀집 거주하고 있는 디트로이트 시내와 백인 중산층이 거주하고 있는 교외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로의 이름이다. 이 영화는 8마일의 남쪽 그러니까 흑인 밀집 지역에 사는, 그래서 백인으로서 역차별을 받는 에미넴이 랩 배틀(rap battle)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랩 배틀(rap battle)이란 관중들의 반응으로 승자가 가려지는 토너먼트 형식의, 촌스럽게 말해서, 노래자랑대회이다. 단순한 노래자랑대회는 아닌 게, 사전에 준비된 아무런 가사나 곡 없이 즉석에서 비트에 맞춰 가사를 만들어내 상대방을 공격해야 한다. 그래서 말로 하는 이종 격투기와 비슷하다.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을 가사에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노래가 아닌 웅변, 또는 암혹한 현실에 대한 고발로 들린다.
영화의 설정을 보면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사는 에미넴이 그냥 집도 아니고 이동식 간이주택인 트레일러에, 그것도 주인 아니라 세입자로서 산다든지, 에미넴이 판형 공장에서 잔업까지 자청하면서 일하지만 독립할 수 있는 돈을 만지지 못한다든지, 남편 없는 여성이 이끄는 가정, 그리고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의 실상이 잘 그려져 있다. 트레일러는 원래 여행용으로 개발됐지만 서민들의 트레일러는 움직이지 않는다.
에미넴은 랩 배틀에서 처음엔 흑인 관중들의 기세에 눌려 입도 뻥긋 못하고 물러났지만 나중에는 흑인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에서 그는 상대 흑인 래퍼가 피부만 검을 뿐이지, 비싼 사립학교 출신이고 랩할 때만 8마일 남쪽으로 내려오는 위선자라고 공략해 관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는다. 인종이 아니라 계급으로 편을 나누는 데 성공한 것.
흑인 래퍼는 그의 통렬한 고발에 말문을 열지 못하고 경기를 포기하고 만다. 에미넴은 공장으로 심야 잔업을 하러 발길을 돌린다. 랩 배틀에서 이겨도 저임금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계속될 수밖에 없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점에서 굉장한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는데 실제의 에미넴은 랩 올림픽에서 2등을 차지했고 음반 계약을 맺고 수백 만장의 음반을 팔아서 빈곤에서 탈출한다. 어느 쪽이 더 리얼한 것일까.
디트로이트의 희망지대 '포커스: 호프'
블루 아메리카의 마지막 편으로 디트로이트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에미넴과는 정반대의 궤적을 보인 또 다른 백인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다. 에미넴은 성공해서 8 마일을 벗어났지만 이 사람은 67년 7월23일 43명이 죽고 1500명이 다치는, 당시로서는 최악의 폭동이 이곳에서 일어났을 때 8 마일을 넘어서 남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노 조사이티스(Eleanor Josaitis). ‘옥돌’이라는 독자가 봉사활동을 했다고 하는 ‘포커스: 호프(Focus: HOPE)’라는 시민 인권단체의 최고경영책임자(CEO)다. 올해 72세의 할머니다.
포커스: 호프는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돋아난 싱싱한 육림원 같은 곳이다. 지난 번에 소개했다시피 디트로이트는 바그다드를 연상시킬 만큼 아직도 폐가들이 줄을 잇고 있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일부러 집을 방화한 경우도 많아서 그냥 폐가가 아니라 속이 검게 탄 흉가들이다. 이 흉가들은 고대유적처럼 보존하려고 내버려둔 게 아니다. 철거할 돈이 없어 방치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시내 북서쪽 오크맨 블레바드(Oakman Boulevard) 주변은 섬처럼 깨끗이 정돈돼 있고 사람들이 부산히 오고 간다. 바로 이곳이 '포커스: 호프'의 캠퍼스다. 자동차공장의 발상지 하이랜드 파크(Highland Park) 근처 5만평의 땅에 자리잡은 이 캠퍼스에는 18동의 건물이 있고 500여 명의 상근 활동가들과 5만10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배고픔과, 경제적 불평등, 인종 갈등, 교육의 불평등과 같은 난제들을 풀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연간 수입이 6000만 달러(720억 원)를 넘으니 웬만한 대기업 수준이다.
사실 대기업은 대기업이다. 6000만 달러 중 절반 이상인 3400만 달러를 이곳에서 운영하고 있는 고급기술센터와 같은 곳에서 정밀기계를 제작, 판매해서 벌어들인다.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필수보조식품 배급센터는 임산부와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산모, 6세 이하의 아동, 노인 등 4만3000명의 저소득 가구에게 매달 우유와 생선통조림, 쌀, 감자 등 필수불가결한 영양분을 공급한다. '포커스: 호프'는 미 의회를 움직여 농무부로 하여금 전국적인 단위로 자신과 유사한 필수보조식품 무상제공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했고 지금은 32개 주에서 이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다.
기계기술인훈련센터(Machinist Training Institute, MTI)는 미시간 주에 새로 공급되는 숙련 기술자의 43%를 배출하고 고급기술센터(Center for Advanced Technologies)에서는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계 엔지니어들이 육성된다. 5개의 대학과 6개의 기업들과 협력체제를 구축, 이 곳에서 대학처럼 학사 학위도 받을 수 있고 졸업하면 바로 취직도 될 수 있다. 현재는 146명이 등록해 있는데 미국 기계공학 부문에서는 가장 많은 흑인이 등록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여기서 학사학위를 받아서 취직하면 초봉으로 평균 연간 5만5000달러를 받는다고 '포커스: 호프'측은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31명이 학사학위를 받았고 단기대학 학위(Associate degree)는 70명이 받았다.
정보기술센터(Information Technologies Center)는 정보혁명에서 소외된 소수인종과 여성에게 네트워크 관리와 설치, 서버 관리 등에 관한 정보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다. 지금까지 500명이 센터를 다녀갔는데 업계에서 2년 정도의 경험을 더 쌓고 자격증을 획득하면 연 4만 달러에서 6만 달러는 벌 수 있다고 한다.
‘첫 걸음(First Step)’과 ‘속성과정(Fast Track Program)’은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성인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기계기술인훈련센터에 입학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주는 프로그램이다. 아동교육기관도 있다. 어린이센터(Center for Children)는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기부터 6세 이하의 어린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곳이며 12세 어린이까지는 방과후 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포커스: 호프'에서 일하는 상근직원이나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 모두 자녀들을 이 센터에 맡길 수 있다.
공동체 예술 프로그램(Community Arts Program)은 문화적으로 인종과 계층의 벽을 허물고 통합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미술품과 사진 작품들을 전시하며 춤과 음악을 가르친다. 도시와 교외의 어린이들이 편지로 교류하도록 펜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포커스: 호프'에는 매년 5천명의 방문객들이 다녀가는데 지금까지 다녀간 인사들 중에는 빌 클린턴,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이 있다. 외국에서 견학 오는 사람들도 잇따라서 방문자의 출신국가수는 43개국에 이른다.
필자도 기업체에서 온 두 사람과 함께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해 어린이센터에서부터 고급기술센터까지 두루 살펴보았다. '포커스: 호프'가 이대로 뻗어나가다간 이 안에서 유아교육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이뤄질 날도 올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체계화돼 있었다.
* 컴마사이 레이포드(Kumasi Rayford) 32세.
31주간 기계기술인훈련센터의 교육과정에서 정밀 기계와 금속 가공 기술 이수, 2000년 1월에 졸업. 현재 제너럴 모터스 선임 설계 엔지니어. 그의 회고,
“센터 시절에 신병훈련소에서 빡빡 기는 것처럼 힘들었지만 정말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 캐롤린 휴즈(Carolyn Hughes) 48세.
2000년 정보기술센터 졸업. 현재 EDS의 네트워크 구조 담당 애널리스트. 그녀의 센터에 대한 회고,
“전통적인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집중적인 현장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최첨단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후회 없이 알찬 시간을 보냈다.”
* 데니스 웨더스(Dennis Weathers).
92년 속성과정(Fast Track), 94년 기계기술인훈련센터 그리고 2001년 고급기술센터 졸업. 현재 포드 자동차 공정 담당 엔지니어.
“처음에 누나가 뭐하고 살 거냐고 다그쳐서 누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영어와 수학을 배우는 속성과정에 등록했다가 프로그램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기계를 만지기 시작해 엔지니어가 됐다.”
주부에서 사회운동가로
이 '포커스: 호프'를 세운 사람이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 신부와 조사이티스다. 그들은 67년 12번가의 폭동에 충격을 받아 다시는 폭동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포커스: 서머 호프(Focus: Summer Hope)'를 세웠다. 서머(여름)가 이름에 들어간 것은 67년 폭동이 7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듬 해 여름에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원하고 노력하기 위해서였다. 68년 여름에도 인종 갈등이 폭발할 기운은 여전히 팽배했지만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자 그들은 서머를 이름에서 제외하고 인종갈등 해소와 빈곤 구제운동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필자에게는 조사이티스가 커닝햄 신부의 감화와 인도를 받아서 운동에 참여했긴 했지만 더 놀라운 인물로 여겨졌다. 고교 시절 치어리더 출신의 평범한 주부, 아이도 다섯이나 낳아서 장사를 하는 남편 도널드 조사이티스와 디트로이트 교외에서 안정된 삶을 살던 36세의 주부가 어느 날 바뀌기 시작했다. 빈곤과 인종편견과 싸우는 전사가 돼서 정신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더니 커닝햄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급기야는 CEO가 돼 그 큰 조직을 이어받았다.
그녀에게 변화의 단초는 60년대 어느 날 한 TV 프로그램의 시청이었다.
“뉴렘베르그 재판(Neremberg trials; 나치 전범 재판)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앨라배마주의 셀마(Selma)에서 몽고메리(Montgomery)까지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행진하는 흑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곧 경찰관들이 출동해 전기봉으로 흑인들을 찌르면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나라에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과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일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만약 독일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마치 그런 탄압을 못 본 것처럼 무시하고 있을 것인가?”
커닝햄 신부는 그런 그녀를 인도해 흑인 인권운동에 눈을 뜨게 했고 두 사람은 67년 7월 폭동이 지나간 디트로이트 거리를 함께 걸으면서 시민 인권단체의 창립에 합의한다. 먼저 '포커스: 서머 호프'의 창립 사명이 독특하다.
“모든 인간이 아름답고 존엄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인종주의와 빈곤, 불의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조화롭고 신뢰와 애정 속에 살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영리하고도(intelligent) 실용적인(practical) 행동을 취할 것을 다짐한다. 검든, 희든, 노랗든, 갈색이든, 빨갛든 디트로이트와 그 교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경제적 지위와 출신국가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떠나 이 다짐을 함께 한다.” (1968년 3월8일)
이 단체의 영리하고도 실용적인 접근법은 영양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식량을 배급하고 기술이 부족하거나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조사이티스 개인은 안정된 중산층의 기준에서 보면 전혀 영리하거나 실용적이지 않은, 급진적이고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교외에 있는 집을 팔고 8마일 남쪽에 있는, 아직도 검게 그을린 셔우드 포레스트(Sherwood Forest)에 있는 집으로 이사한 것. 중산층의 시각에서는 범죄자들이 득실대는 우범지대로 자청해서 들어간 것이었다. 그 때 가장 어린 아이가 세 살이었고 가장 큰 아이가 열 한 살이었다.
“나는 피부색이 아니라 인간 됨됨이로 평가 받는 그런 통합된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살지 않으면서도 인종적으로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한다고 설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한테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영국 언론인 데이비드 코언이 쓴 ‘Chasing the RED, WHITE, and BLUE’에 따르면 그녀의 시집, 친정 식구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시아버지는 그를 더 이상 가족으로 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가족 사진을 그의 집에서 치웠다. 시동생은 그녀에게 자기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니까 조사이티스를 포기하고 결혼 전 이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친정 어머니까지도 그녀가 손주들의 안전을 해치고 있다며 손주들을 내놓으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정도 되면 남편 도널드가 대단한 사람이다. 아무리 부인이 하려고 하는 취지에 동감한다고 해도 본가의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옮겨가면서 받쳐주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주부는 아이가 다섯 살 때까지는 집 안에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결국 (사랑스럽게) 투덜대면서 따라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는 당시 엄마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사한다는 건 전혀 몰랐다.”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5월2일자에 보도된 올해 46세인 아들 마크 조사이티스의 회고다. 그는 플로리다 주에 있는 신문 <팜 비치 포스트>의 편집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그 전에 방 세 개짜리 집에 살았는데 이사간 집은 방이 다섯 개가 돼 널찍하고 좋았다.”
아이들은 커닝햄 신부를 빌 삼촌(Uncle Bill)이라고 부르면서 따랐다.
실용적이고 영리한 접근법
'포커스: 호프'는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본래의 영리하고도 실용적 접근법에서 벗어난 게 없다. 안내를 맡은 '포커스: 호프'의 직원 돈 게이트우드(Don Gatewood)는 이렇게 말했다.
“식량 배급과 인종 갈등 해소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운영하다가 교육 이외에는 소외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위로 끌어올릴 길이 없다고 믿고 기계기술인훈련센터를 81년에 개소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이 센터에 들어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니까 87년 어린이센터를 열었다. 훈련센터에 들어올 만한 실력이 없어서 못 들어오는 성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첫 걸음'과 '속성과정'을 열었다.
기계기술인교육만으로는 완성된 기술교육을 할 수 없으니까 93년에 고급기술센터를 열었고 그쯤 되니까 조직이 커져서 다양한 문화를 교환할 수 있는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공동체 예술 프로그램을 95년에 시작했다. 기술 중에서 정보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그 분야에 대한 수요가 늘자 정보기술센터를 99년에 세웠다.”
그렇게 가지를 쳐나갔기 때문에 '포커스: 호프'는 일반기업에 못지 않는 효율성과 관련성을 자랑한다. 그 뒤에는 조사이티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관리가 있었다. 커닝햄 신부가 '포커스: 호프'를 대표해 좋은 일을 많이 해왔다고 하면 그녀는 뒤에서 사람들을 다그치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왔다. 으레 봉사단체 같은 곳은 온정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남아도는 인력이 있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포커스: 호프'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사이티스는 철저히 일을 시키고 엄격한 직업윤리를 확립했다.
그녀가 얼마나 악역을 맡았던지 초기에 동료가 연 파티에 공동설립자인 그녀가 초대 받지 못할 정도였다. 커닝햄 신부는 한없이 상심해 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며 “축하해요. 드디어 당신은 해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악역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뜻이다.
간암에 걸린 커닝햄 신부는 그녀에게 '포커스: 호프'를 맡기고 67세를 일기로 97년 숨을 거뒀다. 이듬해인 98년 토네이도가 불어닥쳐 캠퍼스가 사정없이 부서져 1800만 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한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호경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 기부가 격감했다. 가톨릭 교회는 커닝햄 신부가 맡아왔던 CEO 자리를 그녀로부터 앗아가려 했고 남성 이사들은 여성 CEO를 못마땅해 했다. 거기다 자연재해와 경기 불황까지 겹쳤으니 그녀의 지위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800명이 넘던 상근직원을 500명으로 줄이는 긴축을 단행하고 무려 1000억 원에 가까운 8160만 달러의 모금 캠페인을 성공시켜 어느 때보다 탄탄한 재정기반을 갖춘, 가장 효율적인 '포커스: 호프'를 탄생시켰다. 지금은 커닝햄 신부 못지 않은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됐다.
조사이티스가 웅변하는 가치
그렇게 강인한 의지의 주인공인 조사이티스도 암 발병만은 피해 갈 수 없었다. 200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던 그녀도 우울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이 해 어머니의 날에 아들 마크는 조사이티스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멀고 먼 플로리다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디트로이트로 찾아왔다. 다음은 마크의 회고다.
“그 날 하필이면 어머니는 카마노스 암센터에서 검사를 받고 향후 방사선 치료 일정을 짤 약속이 잡혀 있었다. 아버지와 우리는 환자 대기실로 가서 진찰을 마치고 나오는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계획을 세웠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엄마가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항상 일을 할 때 그렇게 하시듯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가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의자에서 일어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당황해서 뒤쫓아가는데 이미 엄마는 건물을 빠져나가 CT 촬영하는 곳으로 향했다.
내 딸인 노라가 뛰어가서 겨우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는 놀라서 믿기지 않는 듯 우리 일행을 쳐다보다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동시에 미소를 지으며 노라와 내 아내 로나 그리고 나를 껴안았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이 아이들이 플로리다에서 온 내 가족’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셨다.”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기사에서 이 대목을 읽으면서 눈물겨웠다. 그렇게 투철한 삶을 사는 한 여성이 순간적으로 자식의 사랑에 무너지는 어머니로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조사이티스는 암조차 이겨내고 하루에 12시간을 일한다. 새벽 4시45분이면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사실 그녀가 그렇게 분투해도 한번 페허가 된 디트로이트는 예전의 영화를 찾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흑인 80 : 백인 20'인 디트로이트의 인종 비율이 말해주듯 인종갈등은 갈등보다 더 냉정한 인종분리로 고착됐다. 에미넴처럼 한 개인은 화려하게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지만 그 빈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메우는 구조는 여전하다. 사회적 불평등과 왜곡된 분배구조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다. 어느 한 개인이나 단체가 이룰 수 없는 큰 명제다.
그러나 '포커스: 호프'의 창립 사명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믿지 못한다면, 그런 신념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정치적 해결이란 힘의 대결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힘과 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존중, 부의 기계적 재분배보다는 기회의 재분배, 교육을 통한 자기 존엄의 확인, 그런 가치들이 바탕에 깔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사이티스가 비록 디트로이트를 잿더미에서 일으키지는 못할지라도 보다 더 큰 근본적인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고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그 가치를 믿었기에 평범한 주부에서 성공적인 시민 인권 단체의 대표로 성장했고 대표가 돼서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덥히고 있다. 필자는 그것이 블루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가치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