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1일 잔금을 치르고 9월 1일 르노삼성의 SM5를 인도받은 유아무개씨. 다음날 우연찮게 영업소를 다시 찾은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홍보전단을 맞닥뜨린 뒤 한동한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90만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가며 장착했던 장애우용 안전패키지를 르노삼성이 9월 1일부터 2005년형 SM5 출시라는 명목으로 무료로 장착해 판매하고 있었던 것.
"9월이 되면 판매조건이 안좋아질 수 있다"는 영업사원의 말만 굳게 믿고 부랴부랴 차량 구매를 서둘렀던 그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영업사원에게 "왜 이런 사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느냐"며 여러차례 항의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몰랐다"는 말뿐이었다.
최아무개씨도 억울함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씨 또한 지난 8월 29일 계약해 9월 1일 차량을 인도받았지만, 9월 1일부터 2005형 SM5가 나온다는 사실은 전혀 전해듣지 못했다. 때문에 옵션 장착에 따른 비용은 고스란히 자신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최씨는 "만약 2005년형이 발표된다는 사실만 알았어도 수십만원에 이르는 옵션장치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을텐데…"라며 속았다는 생각을 지금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속았다'고 생각하는 구매자들
이처럼 지난 9월 1일 르노삼성의 갑작스런 판매조건 변경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불만을 호소하는 등 SM5 구매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르노삼성차의 부당한 마케팅 항의연대'(이하 SM5 항의연대, cafe.daum.net/SM5AUG)라는 카페를 만들어 유사한 피해사례를 접수하는 한편, 조직적인 온라인 항의시위도 벌이고 있다.
지난 9월 1일 개설된 이 카페에는 지난 8월말께 르노삼성의 SM5를 구입한 소비자 291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회원 대다수는 유씨, 최씨처럼 르노삼성의 판촉전략에 의해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다.
회원들은 "8월말 SM5를 구입할 당시만 해도 9월 1일 파격적인 판매이벤트가 시행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면서 "소비자들이 금전적인 손해를 당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판매에만 열을 올렸던 부도덕함에 분노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8월만큼 파격적인 조건은 르노삼성으로서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한 회원은 "사기 친 게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2004년형에 옵션사양만 장착한 2005년형이 화근
소비자들의 이러한 분노는 르노삼성이 현대자동차의 소나타NF 출시에 대응하기 위해 9월 1일 2005년형 SM5 모델을 출시한다고 '갑자기' 발표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르노삼성은 "고객이 선호하는 최고급 사양을 가격 증가 없이 기본으로 장착한 '2005 SM5' 출시를 통해 중대형차 시장에서 부동의 자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홍보하며 대대적인 판촉행사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날 공개된 2005년형 SM5는 홍보자료에서 밝힌 바와 같이 2004년형과는 일부 옵션사양이 기본사양으로 장착된 것 이외에는 하등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 60만∼90만원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했던 옵션품목을 기본품목으로 바꿔 2004년형과 동일한 가격으로 시판한 점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얘기다.
르노삼성차쪽도 이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르노삼성차의 한 관계자는 "일부 사양을 조정해 소비자에게 혜택을 준다는 전략적 차원에서 2005년형을 내놓은 것"이라며 "2005년형은 신차가 아니라 2004년형과 거의 똑같은 차량"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마케팅 전략 덕분에 르노삼성은 지난 8월 3910대 판매에 그쳤던 내수판매량을 9월 5151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9월 1일 차량을 인도받는 당일까지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던 소비자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판매자와 소비자간의 신뢰가 완전히 붕괴됐다며, 이를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르노삼성이 공식 사과에 나서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판매조건 변경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소비자 선택권 무시한 것"
임응석 SM5 항의연대 카페장은 르노삼성의 이같은 판촉전략은 소비자의 선택권을 가로막은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는 "분명 르노삼성의 영업지점장들은 판매조건이 변경된다는 사실을 9월 1일 이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이를 알고도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명백히 소비자의 선택권을 무시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는 "우리는 옵션에 대해 환불을 하라거나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라며 "국내 정서와는 맞지 않는 마케팅 전략을 펼친데 대해 한국 소비자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감성적으로 보상해 달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사항"이라고 말했다.
대표적 자동차시민단체인 자동차10년타기운동본부도 르노삼성의 도의적 책임을 거론했다. 운동본부의 한 관계자는 "현대나 기아자동차의 경우는 판촉조건이 변경된 날로부터 5일 이내면 환불해 주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르노삼성만 조치를 해주지 않는다면 법적으로는 몰라도 상도의상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보호원도 SM5 구매자들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구제책을 강구하기는 힘들지만, 르노삼성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다하지 않은데 대해서는 도덕적 비난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르노삼성 "억울함 이해 하지만 소급혜택 힘들다"... 시민단체 "도의적 책임은 져야"
르노삼성도 소비자들의 억울함을 이해하는 눈치다. 하지만 이를 소급해 보상해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르노삼성의 한 관계자는 "9월로 넘어오면서 판매조건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소비자들이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이전 구매자에 대한 소급 적용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이 관계자는 "내가 소비자라도 억울할 것"이라며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결론적으로 소급을 못해주는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러한 판촉방식은 업체 전반에 관행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이해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자동차 10년타기 운동본부는 이러한 판촉방식에 따른 소비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판촉조건 변경 예고제'를 실시할 것을 각 업계에 제안했다. 운동본부의 한 관계자는 "10만∼20만원 정도가 아니라 90만∼100만원이 오가는 판매조건을 갑작스럽게 하루아침에 변경하는 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다"며 "적어도 5일 전에 판촉조건의 변경을 예고하는 예고제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