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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안개서린 주산지
새벽 안개서린 주산지 ⓒ 최윤미
툭. 툭. 투둑. 고요한 산 밑에서부터 밤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지런한 첫닭이 울고, 긴 여백을 둔 울음 사이사이 아주 낮게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소리가 꼭 새벽이 오는 소리 같아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직 밝지 않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마저 흐릿한, 안개 자욱한 마을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있는 듯한 착각, 조금 쓸쓸하고 많이 비장했던 것 같다.

서둘러 배낭을 정리하고 등산화를 단단히 묶은 뒤 어둠 속으로 길을 나섰다. 주산지의 새벽을 만나려면 적어도 6시쯤에는 길을 나서야 한다.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에 자리한 상의리 민박촌에서 주산지 입구까지는 차로 30여 분, 주산지는 거기서 또 30여 분 정도를 걸어가야 만날 수 있다. 논 사잇길을 걸어 마을을 빠져나오는 동안 축축해진 땅과 싸한 공기 속에서 가을이 짙게 느껴졌다.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
단풍이 곱게 내려앉았다 ⓒ 최윤미
민박촌 입구에서 10분쯤 기다리자 안개 속을 뚫고 뿌연 불빛 하나가 달려왔다. 전날 저녁, 민박집 주인 아저씨를 통해 예약한 부동면에 단 한 대 있다는 귀한 택시였다. 교통편이 없어서 주산지의 새벽은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다행이 운이 좋았다.

기사님은 주산지의 물안개가 특히 멋지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촬영오는 사람들을 간간히 태워 주셨다고 한다. 주산지 입구에서 주산지까지는 널찍한 비포장 도로가 나 있었다. 안개가 서려 그윽한 숲길을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오르는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가을 타는 마음도 멀찍이 물러날 만큼.

주산지 전경
주산지 전경 ⓒ 최윤미
주산지(注山池)는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오래된 인공 호수이다. 대중교통도 없고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그 비경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었는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지가 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산과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던 호수와 물 속에 잠긴 둥치 굵은 나무들, 호수 위에 떠있던 작은 암자는 영화 속에서 선명한 사진 한 장처럼 아름다웠다.

안개 걷힌 아침 하늘이 곱다
안개 걷힌 아침 하늘이 곱다 ⓒ 최윤미
아침 7시,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주산지는 온통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물도, 나무도, 산도, 짙은 안개에 가려 있어서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풍경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기 힘들 만큼 신비로웠다.

호숫가로 내려가 150여 년 묵은 왕버들이 흐릿하게 보이는 자리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눈에 익어, 옅어지다 다시 짙어지고 조금씩 물이 흐르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영영 안걷히면 어쩌나 싶을 만큼 짙은 안개가 서서히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옅어지더니 갑자기 걷혔다. 그리고는 수면을 떠나 산을 거슬러 하늘까지 서서히 올라갔다.

물안개가 걷히고 제 모습을 드러낸 주산지는 이제 막 가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고요한 수면은 돌멩이 하나의 파장도 생생히 드러낼 만큼 투명했고, 아침 햇살을 받은 고운 가을산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기이하게 생긴 왕버들은 수면에 그대로 반사되어 멋진 데칼코마니 작품(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스케치북을 반으로 접어 편 다음 한쪽에 물감을 칠하고 다시 접어서 똑같은 모양을 찍어내곤 했다)을 보는 듯했다. 작고 아담해서 더 아름다웠던 주산지에서 오래 머물다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새벽에 지나올 때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한낮이 되자 생생히 눈에 들어왔다. 군내버스가 다니는 이전리까지 가는 5~6km 정도의 도로변에는 추수를 끝낸 들판과 사과 과수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길 양쪽으로 붉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달콤한 사과 향기가 진동했다.

언제쯤 다시 그 곳에 갈 수 있을까. 사과꽃 필 무렵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연둣빛 잎들이 막 돋아나는 봄에도, 눈내린 한겨울에도 주산지는 참 멋질 것 같다.

사과나무
사과나무 ⓒ 최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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