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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 영정 ⓒ 현충사
<칼의 노래>란 소설책이 나오고 이순신 이야기가 연속극으로 나오니 요즘 책방에는 '이순신 책'이 그야말로 널리고 판칩니다. 어린이 책이 꽂힌 자리에도 이순신을 기리고 읽자는 책이 가득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릴 만한 '영웅' 가운데 하나이니 이렇게 온갖 책이 나올 만합니다. 하지만 좀 지나쳐 보이지 않습니까?

인터넷 책방에서 '이순신'을 쳐서 찾아보니 수백 가지도 넘는 책이 뜹니다. 참 기가 차고 놀랄 일인데, 이렇게까지 책방에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이순신 책은 얼마나 역사 사실을 살폈을까요? 이순신을 읽어서 배우거나 즐길 것을 얼마나 담았을까요?

이순신을 대접하듯 을지문덕을, 강감찬을, 고선지를, 계백을, 곽재우를, 또 아무개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이순신은 우리나라를 왜놈에게 지킨 장수 가운데 한 분이긴 하지만 '전쟁' 영웅을 지나치게 부추기는 일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영웅도 영웅이지만 전쟁도 전쟁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뽑아든 칼이지만, 서로서로 죽이고 죽는 칼을 앞으로 내세우는 일은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상비군은 결국 전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비군은 항상 전쟁에 대비한 무장을 갖추고 나타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기 때문에 부단히 타국을 전쟁으로써 위협하고, 무제한으로 많은 군비의 확장에 있어서 서로 우세를 경쟁하도록 자극한다. 이리하여 마침내는 군비 경쟁에 사용되는 비용 때문에 도리어 평화는 단기간의 전쟁보다도 가일층 힘에 겨운 부담으로 된다. 그래서 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고 상비군 자신이 공격전의 원인으로 되기 때문인 것이다. <칸트-영구평화를 위해서, 정음사(1974)> 12쪽

철학자 칸트는 1795년에 <영구평화를 위해서>란 글을 씁니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생긴다면서, 서로를 경계하고 자기 나라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군대를 두면, 그 자체로 군사비로 써야 하는 엄청난 돈과, 군대 스스로 평화를 지키지 않는 일 때문에 평화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밝힙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저는 전쟁영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전쟁영웅을 좋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싸움터에 나가서 적군을 얼마나 많이 죽였다고 으스대면서 하는 말이 자랑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백성민 씨가 그린 <조국은 내 사랑> 겉그림입니다. 이때도 만화는 심의필을 받아야 했습니다. 겉그림 한켠에 찍힌 심의필 도장이 아주 볼꼴사납습니다.
백성민 씨가 그린 <조국은 내 사랑> 겉그림입니다. 이때도 만화는 심의필을 받아야 했습니다. 겉그림 한켠에 찍힌 심의필 도장이 아주 볼꼴사납습니다. ⓒ 최종규
<2> 백성민 만화를 만나다

엊저녁입니다. 한국외대 옆에 있는 헌책방에서 <조국은 내 사랑, 고려원미디어(1992)>이라는 만화책 하나를 만났습니다. 책이름을 좀 틀에 박힌 말로 지어서 '뭐 저런 책이 다 있나' 싶어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움찔 놀랐습니다. 그린이 이름에 '백성민' 세 글자가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민'? 그 만화가 백성민일까?

얼른 집어서 펼칩니다. 아. 맞습니다. 백성민씨가 이런 만화도 그렸나 싶어서 부리나케 책장을 넘깁니다. 틀에 박힌 책이름이라서 뻔한 줄거리를 담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웬걸,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물 흐르듯 아주 술술 펼치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건드리기 아주 어려운 문제이고,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며, 아주 차분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으면 욕 얻어먹기 쉬운 문제를 다룬 만화가 바로 <조국은 내 사랑>이었습니다.
"스님이 천만 명이 있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모두 양반의 개 노릇 아니면 그들의 불사 놀이나 해 주며 그들의 재산과 지위만 찬양해 주는데, 그런 밥버러지들에게 무슨 법도를 바라겠느냐?" <117쪽>

만화 배경은 1593년부터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앞서 입니다. 주인공은 산우리(계집), 산부리(사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천민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릴 적 낙동강 김해 마을에 살았다는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천민의 딸인 '죽은 어머니'와 어릴 적 단짝이었고 자연스럽게 장래를 약속했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세도가인 양반이 돈과 재물로 어머니를 데려가려고 했고, 억장이 무너진 아버지는 양반인 박 진사에게 항의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며칠 동안 이어지는 끔찍한 매질. 아버지는 그렇게 매 맞고 죽을 수는 없어서 어느 날 밤, 나무에 묶인 밧줄을 어렵사리 끊고 박 진사 집을 불바다로 만들어 그 집 양반들을 황천으로 보낸 뒤 어머니와 함께 마을을 떠나 문경새재로 들어갔대요.

그곳에서 양반만큼은 죄다 잡아 죽이는 살인 도적이 되었다는데, 재물만 뺏고 목숨은 살려준 농민이 고자질을 해서 그곳에서도 내빼야 했는데, 내빼는 길에서 어머니는 죽고 어린아이 둘은 겨우 살려서 구월산에 들어와 기승에게 무술을 배웠다는군요.

그렇게 무술을 배운 뒤 '나를 죽이려는 양반들, 그들과 더불어 사는 농민이 멸망할 때까지, 그래서 천민 세상에 올 때까지' 무술을 익히고 써먹을 거라고 다짐을 했고, 마침 이웃나라 일본이 조선으로 쳐들어올 채비를 하는 터라 일본군 정탐병 노릇을 해 주기로 하며 '조선이 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버지가 기른 아들과 딸은? 아버지가 왜놈들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걸 알게 된 아들은 갈등합니다.

"민족이 무엇이더냐? 아비가 무엇이더냐? 이 몸은 또 무엇이더냐? 우리는 이 땅, 이 흙에서 태어나고, 죽어서 이 땅, 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너와 나는 한 몸, 한 흙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 땅의 흙으로 빚어진 몸을 가진 자는 다 안다. 그런데, 그런데…."<167~171쪽>

아들은 갈등한 끝에 관군으로 들어갑니다. 딸 또한 고민하지만 "민족, 애국 같은 건 난 어려워서 잘 몰라. 날 낳아 주신 아버님 곁을 떠날 순 없어" 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요.

<3> 틀린 말은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이라고? 애국이라고? 기름기 흐르는 양반들을 보호해 주기 위한 애국이더냐? <163쪽>" 하고요.

자, 어떻습니까? 이 말이 옳습니까, 그릅니까? 우리가 겨레사랑과 나라사랑을 말하는 일이 '기름기 잘잘 흐르면서 백성을 짓밟고 위에 올라선 양반을 지키고자 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이 땅, 이 흙에서 태어나서 다시 이 땅, 이 흙으로 돌아가는 보통사람인 우리들 자신과 이 터전을 생각하고 지키는 일일까요?

나라를 다스린다는 임금과 신하가 나라를 이끄는 백성을 헤아리지 않고, 돌보지도 않을 뿐더러 자유와 평등도 없이 불평등과 계급과 차별만 있다면, "기름기 흐르는 양반들을 보호해 주기 위한 애국이더냐?" 하고 외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관군이 되어 왜놈을 막겠다고 나서는 아들 마음도 무겁습니다. 나라를 지켜도 기쁘지 않고, 나라를 못 지켜도 슬프지 못한 겁니다. 왜놈을 몰아내어 나라를 지켜낸다고 하더라도 천민은 천민이고 백성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양반은 그대로 양반이며 임금은 또 그대로 임금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화책 <조국은 내 사랑>은 이런 문제를 내놓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문제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야기는 아버지가 마지막에 마음을 돌려 아들과 함께 일본군을 무찌르는 일에 나서는 대목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1:1로 맞붙어야 하는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그 싸움판을 말리려던 딸이 아버지 칼에 맞고 숨을 거두거든요. 그때 아버지는 죽은 딸을 부둥켜안고 울었고, 아들은 나까지 벤 다음 관아를 부수라고 외치는데, 아버지는 칼을 다시 들고 뒤를 돌아 일본군 쪽으로 달려가거든요.

백성민 씨는 책 끝에 이렇게 적습니다.

산부리, 산우리, 땡추(아버지).
그들은 이 땅의 산과 들, 삼천리 방방곡곡
그 어디에나 있었다.
너와 내가 지금 밟고 선 이 자리도
유명, 무명의 그런 선인들이 목숨을 내놓고
외적들과 싸웠던 바로 그 자리요,
그 땅인 것이다.
<200쪽>

그렇습니다. 일본군이 조선땅을 거의 차지했을 때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신분이 낮고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임금이 다치거나 서울이 함락되는 일을 슬퍼할 겨를도 없지만 알지도 못하고 눈길도 안 둡니다.

새 임금이 오르든, 임금이 죽든, 임금이 오래 살든 차별과 불평등이 달라지거나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일본이 우리 땅을 다 차지해도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는 사람들 삶이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그런 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칼을 들고 창을 들고 나서서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런 수많은 백성을 이끈 이순신이며, 신립이며, 사명당이며, 권율이며, 곽재우며, 조헌이며. 참으로 많은 장수들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여러 신하와 장수는 상도 받고 역사에도 이름이 남습니다. 하지만 그 임진왜란 때 죽은 엄청난 백성들, 그야말로 온몸을 내맡겨 싸웠던 그 많은 백성들 이름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위령비라도 제대로 섰나요? 그들에게 얹힌 엄청난 세금과 차별과 불평등과 굴종이 사라졌던가요?

<4> 이순신보다 훨씬 많은 백성들이 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이순신 이야기를 하는 걸 안 좋아합니다. 이순신 하나가 영웅이 되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들 삶이 얼마나 나아졌느냐는 겁니다. 얼마나 백성들이 고달팠고 괴롭고 힘들었느냐는 겁니다. 군대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땅개(육군 소총수)들처럼, 뭍에서 물에서 화살받이가 되고 조총받이가 되었던 숱한 백성들을 떠올리고 되새기면서 함께 말하는 이순신이 아니라면 우리나라와 겨레를 말하는 일은 앞뒤가 올바르게 서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겁니다.

민주주의, 평화, 통일, 자유, 평등, 사랑, 믿음 등등 온갖 좋은 말과 온갖 훌륭한 사상을 이루고 나눌 수 있어야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탕이 올바르게 서야 좋습니다. 그와 함께 가장 평범한, 가장 작은, 가장 하찮거나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보통사람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고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순신은 영웅이겠죠. 하지만 이순신은 영웅일 뿐, 우리 역사를 이끈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땅을 일본군에게서 지켜내고 우리 역사를 이끈 건 바로 우리들 자신이자, 보통사람인 우리들 아버지와 어머니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조곤조곤 담아낸 만화책 <조국은 내 사랑>이 참 좋습니다. 비록 판이 끊어져서 찾아보기도 아주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좋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책이, 이런 이야기가 널리 팔리고 읽히면서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칼의 노래

김훈 지음, 문학동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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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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