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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의 영인본. 세로 21.4㎝, 가로 15.8㎝이다. 원본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지만, 원본이 아닌 허전함은 어찌하랴. 원본은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있다. 선조의 자랑스런 유산을 우리는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다.
직지의 영인본. 세로 21.4㎝, 가로 15.8㎝이다. 원본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지만, 원본이 아닌 허전함은 어찌하랴. 원본은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있다. 선조의 자랑스런 유산을 우리는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다. ⓒ 곽교신
"손에 땀이 나고 머리카락이 서는 듯했습니다. 한 10여 분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첫 순간의 조바심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말기 고종 때 이 땅을 떠나 프랑스에 가 있는 직지를 만나보려는 시도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프랑스가 까다롭게 요구하는 형식 절차는 갖췄으나, 과연 만나보게 할 것인가. 만난다면 어떤 방법으로 만나게 될 것인가, 직접 만져보게는 할 것인가….

90년대 초, 직지에는 손을 대지도 못하게 하며 막대로 책장을 넘기게 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손으로 직접 직지를 만지도록 '허락'했단다. 떨리는 손으로 직지 한 쪽 한 쪽을 넘기던 순간의 감회가 새로운 듯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승철(38) 박사는 지난 10월 22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의 직지 열람을 이렇게 회상했다.

독일은 물론 유럽 문명이 자랑하는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먼저 찍어낸 인류역사상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인류의 빼어난 문화유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약칭이요, 애칭이다.

통상 '직지심체요절'로 부르는 이 위대한 인류 유산이 이 땅에 있지 않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맹렬한 고서 수집가였던 프랑스 대리공사 꼴랭 드 쁠랑시가 저잣거리에서 수집하여 프랑스로 건너간 우리의 수많은 고서적 중 하나인 직지.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문화사적 위치 때문에 매우 소중한 책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와 경위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문화재의 개념 정립이 없었던 시절에 대리공사라는 공직자의 신분으로 주재국의 중요한 문화재를 헐값에 사들여 자국으로 반출했으니 그것은 '강탈'이다. 사리판단 능력이 결여된 자와의 법률행위가 무효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법 정신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보관되지 않았다면 이 소중한 직지가 저잣거리 좌판에서 흐지부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고나 할까. 그후 소장자가 바뀌었다가 프랑스 정부에 기증됐다. 지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2층 동양문화실에 귀중히 보관되어 있다. 직지는 프랑스 최고(最高)의 국가 보물 중 하나이다.

기록문화는 문화발달의 척도

직지 마지막 면의 선명한 두 줄의 기록이 고려를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유네스코에 등재시켰다.
직지 마지막 면의 선명한 두 줄의 기록이 고려를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유네스코에 등재시켰다. ⓒ 곽교신
디지털 인프라가 온 천지를 휘감은 오늘날에도 한 국가의 종이 소비량은 그 나라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다. 종이를 많이 사용함은 무언가 기록할 것이 많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자연히 인쇄술은 문화수준 척도의 백미이다.

타임지에서 지난 천년간 인류가 이뤄낸 위대한 업적을 선정하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제 1위에 놓았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 구텐베르크의 성서가 인쇄될 즈음 이미 한반도에서는금속활자 인쇄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종이의 최초 발명국으로 중국을 인정한 것에도 자존심 상해하던 유럽문명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을 동양의 작은 나라 '고려'에 넘겨주기란 더욱 속 쓰린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지 마지막 면에 선명히 적힌 인쇄 시기, 인쇄 장소, 인쇄 방법에 이견을 달 재주는 없었다.

그런 위대한 문화사의 현장인 흥덕사의 위치를 찾는 것은 국사학계의 오랜 숙원이요, 과제였다. 흥덕사의 오랜 베일이 벗겨진 것은 1984년. 택지조성 공사 중에 드러난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흥덕사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제 금구(禁口)가 발견되며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직지 마지막 장에 쓰여진 '청주목 흥덕사'의 터가 드러난 것이다.

유형문화재 직지로부터 되살아난 무형문화재, 금속활자

흥덕사 터를 확인시켜준 청동제 금구(禁口. 쇠로 만든 북)
흥덕사 터를 확인시켜준 청동제 금구(禁口. 쇠로 만든 북) ⓒ 청주고인쇄박물관
흥덕사 터의 발견으로 직지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면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을 찍어낸 직지의 활자를 재현해보려는 한 장인의 집요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금속활자 제작과 관련한 기술적 기록은 전혀 없다. 근거 자료라고는 오로지 직지 영인본 뿐이다. 직지에 쓰인 1만3000여 문자를 해체 분류하여 각각의 문자 특성을 가려내는 힘든 작업으로 직지 금속활자의 복원은 시작되었다.

분류작업 결과, 조선의 활자 제조법과는 상이한 특성들이 활자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직지의 활자는 조선의 활자처럼 주물사 제조법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오국진(62. 충북 청주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장인의 평소 주장을 학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물사 제조법으론 직지 활자의 기술적 특징을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갖은 시행착오 끝에 오국진 장인의 손에 의해 1377년 고려에서 태어난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가 619년만인 1996년 2월 대한민국의 직지로 다시 태어났다. 1996년을 어찌 직지의 부활 원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프랑스 땅으로 건너가 숨이 끊어진 유형문화재에서 살아 있는 무형문화재로 감격적인 부활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치를 깨달을 틈도 없이 직지를 입양아처럼 프랑스로 보냈듯, 유형문화재에서 어렵게 무형문화재로 부활한 금속활자의 가치를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라 금관이나 백제의 용봉향로처럼 화려함으로 우리의 눈을 매혹시키지 못하니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지식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인류의 지난한 노력의 결정체인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는 가슴 벅찬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장인의 집요한 노력과 학계의 지원 그리고 청주고인쇄박물관의 노력이 없었다면 직지는 영원히 '프랑스 땅의 직지'로 남았을 것이다. 이 세계적인 일을 하기에는 너무 갸냘퍼 보이는 자치단체 청주시의 끈질긴 노력에도 찬사를 보낸다.

필자는 영인본이 우리 나라로 들어오게 된 경위와 흥덕사터가 발견된 시기의 우연 그리고 금속활자 원형을 밀납으로 뜨는 것에 착안한 오 장인의 노력 모두를 고려 금속활자장들의 음덕으로 여긴다. 이 지면에 장황히 소개하기는 힘들지만 그 과정은 모두가 극적이다.

밀납제조법으로 직지 활자를 복원한 오국진 장인의 작업은 완성이 아닌 탐구의 과정이다. 무형문화재가 일단 숨이 끊어져 유형문화재로 박제되면 그 복원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금속활자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직지활자의 실체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뜨겁다. 쟁론과 탐구가 언젠가는 직지 활자의 비밀을 완벽히 풀어내리라.

조선시대의 화려한 인쇄문화는 직지를 찍어낸 고려의 인쇄문화 인프라가 면면히 이어졌음을 증명한다. 창안자와 창안년도가 분명한 유일한 언어이며, 최고의 언어과학적 실용성으로 현대의 디지털 환경에 그대로 적용되는 위대한 문자 한글의 발명 등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과 그 문화형이 같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한글의 발명, 세계 최강의 IT 강국은 모두 그 문화의 궤도가 동일하다. 금속활자를 복원하는 과제는 단순한 활자의 복원이 아니라,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을 복원하는 일이다. 가치를 미처 깨달을 사이도 없이 직지를 프랑스 땅으로 보낸 우리의 자존심을 복원하는 중요한 일이다.

또 하나의 쾌거 '직지상'의 제정

직지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는 '직지상'의 제정이다. 필자는 직지상의 제정 소식을 들었을 때 적잖이 놀랐었다. 이 상이 유네스코 안에 마련되도록 추진한 곳이 놀랍게도 중앙정부가 아닌 청주시였기 때문이다.

직지상은 세계기록유산과 관련하여 유네스코가 정한 유일한 상이다. '인류 기록문화의 보존과 접근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는 이 상의 수상자 결정은 2년마다 열리는 유네스코 자문회의에서 엄정히 결정되지만 시상 주체는 직지의 고향 청주시다.

제1회 수상자는 2005년 중국 리지안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국제자문회의'에서 유네스코 주관으로 결정된다. 시상식을 파리에서 할지 직지의 고향 청주에서 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직지상은 프랑스에 가 있는 직지의 고향이 대한민국임을 2년마다 세계에 반복해서 인식시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뜻 깊은 직지상 수상식이 대한민국 청주 흥덕사 터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기를 필자는 주장하며 또 고대한다.

직지의 세계화에 바치는 청주시의 노력

가로등에 달린 멋진 직지 표지.
가로등에 달린 멋진 직지 표지. ⓒ 곽교신
직지를 프랑스로 보내 맺힌 한 때문일까. 시내버스 등받이에도, 가로등 꼭대기에도 보도블록에도 청주 시내는 직지의 세상이다. 그 뿐이 아니다. 청주 시내를 거닐다가 만난 중·고·대학생 또 일반인 20여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정말 모르겠다는 말투로 "직지란 말이 곳곳에 많이 써 있던데 직지가 뭐냐?"고 물었다. 대략 몇 %의 사람이 대답하는가를 보고 직지의 본고장 청주에서 직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 정도를 가늠해보려 했던 것.

길을 걷다가 받은 갑작스런 질문임에도 답을 못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대답의 수준 차는 있었으나 100%의 답변이었다. 특히 '직지심체요절'을 또박또박 말하며 간략하지만 정확한 설명을 덧붙인 청주체육고등학교 한 남학생을 만난 뒤로 필자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직지에 대한 청주 시민의 지극한 애정의 징표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녀보면 지역 주민의 관내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이 도를 넘는 경우를 흔히 경험한다.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자치단체 청주시의 직지 알리기 노력과 직지에 대한 청주 시민들의 애정과 관심이 놀랍다.

이는 다른 자치단체에서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직지세계화추진단'을 차려 우리 문화를 저돌적으로 세계로 끌고 나가는 청주시의 노력에 직지의 후손으로서 찬사를 보낸다. 청주시의 노력은 조만간에 경제적인 이득으로도 돌아올 것이다. 문화의 보존과 향수로 얻어지는 정당한 이윤은 결코 비난할 일이 아니다.

또 직지와 관련해 청주MBC의 남윤성 부장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를 무대로 10년여의 취재를 바탕으로 한 5부작 다큐멘터리 <금속활자 그 위대한 발명>(3부) <세상을 바꾼 금속활자, 그 원류를 찾아서>(2부)를 만들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고려 금속활자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구텐베르크 활자의 모태가 되었다'는 가설에 대한 정황 증거를 제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남 부장은 취재 과정에서 프로그램의 의도를 파악한 각국의 학자들에게 취재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또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발명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도 있었다.

금속활자의 원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국책사업으로 다룰 시급한 사안이다. 중국이 재정이 풍부해서 동북공정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것은 아니다. 역사 인프라를 선점하여 얻는 막대한 부가가치의 중요성을 우리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는 최소한의 일이다.

이렇게 세계를 향하여 나간다면 언젠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이 고려의 직지를 소장하고 있음을 미안해 할지도 모르겠다. '직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희지만 진정 직지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라는 것을 꾸준히 외칠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이 현재 어디에 있든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이 현실적으로 어디에 있든 직지는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청주시민과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전환해야

직지의 탄생지라는 사실로 전세계에 몇 안 되는 인쇄박물관으로는 가장 비중이 있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청주시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립'박물관이다. 직지가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문화사적 비중을 따지면 이 박물관은 당연히 국립박물관으로 운영되어야 마땅하다.

윤전기의 드럼을 형상화했다는 고인쇄박물관
윤전기의 드럼을 형상화했다는 고인쇄박물관 ⓒ 곽교신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직지를 찍어낸 흥덕사 터에 세워져 있어서 그 위치 또한 의미심장하다. 어떤 문화계 인사가 필자와의 대화 중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직지박물관'이라 칭해서 필자가 전화로 박물관 측에 공식명칭을 문의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직지박물관'이라는 착각은 역설적으로 이 박물관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직지가 인류기록유산의 꽃인 것은 이제는 정설이다. 금속활자를 낳고 직지를 낳은 흥덕사 터에 세워진 '청주고인쇄박물관'은 반드시 '국립고인쇄박물관'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정책의 우선 순위로 말하면 이것은 고려사항이 아니라 시급한 결심을 요하는 사항이다. 자치단체의 재정을 위주로 이 박물관을 지탱해 나가는 것은 직지의 위대한 가치를 아는 세계인들이 고개를 갸우뚱 할 일이다.

세계를 향한 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만으로도 자치단체 청주시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 '청주 고인쇄박물관'을 '국립고인쇄박물관'으로 개편하여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의 국제적 위상과 박물관의 격을 동일하게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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