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호두가 올 해 다시 한 번 큰 흉작을 맞으면서 과연 천안명물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우려가 일고 있다.
지난 3일(수) 시 산림과가 집계한 올 예상 생산량은 약 1천2백가마(약 5톤) 정도. 작년 생산량 15톤의 1/3에 불과한 양이다. 그것도 농가 내에서 자체 소비되는 양을 빼면 시장에 유통되는 양은 3톤가량에 그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가격은 작년 ㎏당 1만8000원 정도 하던 것이 올해는 2만3000원을 훌쩍 넘어갔다. 이에 따라 농협을 통한 출하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직접 찾아와 직거래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나마 약간씩 거래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알 호두가 이런 실정이다 보니 호두과자로 쓰는 가공용 호두가 남아있을 턱이 없다. 이미 수년 전부터 대부분 호두과자업체들은 북한·중국산이나 미국 캘리포니아산 호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 광덕 호두를 고집하던 몇몇 전통 있는 호두과자제조업체들조차 외국산이나 다른 지역의 호두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렇게 되면서 주민들의 입에선 벌써 몇 년 전부터 '이러다 천안명물 광덕호두의 명맥이 끊기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생산량의 3분의 1 수준
재배농가가 체감하는 생산량은 산림과의 예상생산량과 비교하면 더욱 어림없다. 광덕호두 생산량의 70%이상을 차지하는 SK임업(소장 유병갑)의 경우에도 올해 생산량은 2톤에 불과하다고 한다.
수시로 청설모를 잡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관리해온 광덕호두살리기위원회의 이종근 전 총무는 올 해 5가마(2백㎏)를 수확했는데, 농가 중엔 가장 많은 양을 수확한 축에 든다. 이씨는 "30년 동안 광덕에 있으면서 올해 같은 흉년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이씨는 "산림과의 예상생산량은 좀 과한 듯하다"며 "내가 볼 때 올해 광덕 호두는 5백 가마, 2톤도 힘들다. 3백가마나 좀 넘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산림과는 올해 이렇게 흉년이 든 이유에 대해 △전년도에 풍작이면 금년은 흉작이 되는 해거리 현상 △호두나무 수령의 노령화 △청설모 피해 △무더웠던 여름 등을 들고 있다. 특히 해거리와 청설모의 피해가 주요인이 아니겠나는 입장. 하지만 농민들은 청설모 피해와 더불어 개화시기인 올 4월 초·중순 에 걸쳐 내린 서리 피해를 더 근본적인 요인으로 꼽고 있다.
이 전 총무는 "청설모로 인해 손실된 생산량이 전체의 60%이상이다. 올해 초 서리가 내리면서 상수리, 도토리, 잣 등이 대부분 수정에 어려움을 겪고 흉년을 맞았기 때문이다"며 "청설모가 잣이나 낙엽송 씨를 먹다가 호두로 대드는 게 보통인데 올해는 이들마저 흉작이다 보니 호두가 채 여물기 전부터 청설모 피해가 극성을 부렸다"고 전했다.
환경 파괴로 인한 청설모 급증도 한 원인
광덕호두살리기위원회에 따르면 호두생산량은 80㎏들이 2천5백∼3천가마를 생산하던 60∼70년대가 최고 절정이었고, 그땐 국내 호두생산량의 70%까지 차지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점차 재배농민들이 고령화됨에 따라 나무를 돌보는데 소홀해지는 시점에서 엄청난 식성과 번식력을 가진 청설모가 등장,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주민들은 광덕, 풍세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고 광덕산 등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환경이 조금씩 파괴되고 이로 인해 들고양이, 담비, 수리부엉이 같은 천적들의 개체수가 많이 줄어든 것이 청설모 급증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지난 2000년 1월 주민들은 호두살리기위원회를 구성하고 호두지키기에 나섰다. 2000년 당시 호두살리기위원회는 청설모를 잡는 다단식 올무인 청살기를 고안, 보급하고 작목반을 구성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설모를 잡는 일에 작년엔 900만원의 시 예산이 편성돼 마리당 3천원씩 3천마리에 대한 포상금이 지급됐고 올해는 마리당 5천원씩 3천마리에 대한 포상금 1500만원이 지급됐다. 시도 호두가 갖고 있는 천안시 이미지의 프리미엄을 잘 아는 터라 타 작목에 비해서는 나름대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시 산림과 윤석남 영림담당에 따르면 천안시는 2001년부터 매년 3천 본의 호두나무 묘목을 공급하고 있고, 내년엔 1억1000만원의 예산을 편성 호두나무 조림계획을 세운 상태다. 앞으로 매년 20㏊씩 1백㏊ 규모까지 호두나무의 집단 식재에 나설 예정.
이전에도 2001년엔 종자구입 및 양묘에 600여만원, 호두박스 1만1000개 제작비로 500만원을 지급한 바 있고, 2003년엔 충남도와 함께 나서 청설모 예방펜스, 종자지원, 묘목식재 등의 사업에 7852만원을 지원했다. 올 해도 생산기반 및 종자대로 1200만원 지원한 상태. 하지만 투자되는 비용만큼 바로 회수할 수도 없는 품종 특성도 있지만 재배농가와 시의 없는 유기적 협조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10년을 기다려야 하는 호두나무
호두나무는 이란의 페르시아 지방이 원산지로 가래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높이는 보통20m, 직경은 50㎝에 달한다. 서늘하고 보습력이 있으면서도 자갈이 섞인 충적토가 재배에 적합하고 천안 광덕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수입개방과 점점 줄어드는 농가소득에 늘 목마른 농민들은 호두를 심고 길러 수확을 기다릴 시간이 별로 없다. 호두나무는 보통 5년 정도가 지나야 수확이 가능하다. 경제성을 확보하려면 수령이 10년 정도는 돼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령농민층은 굳이 호두를 새로 심을 생각을 않게 되고, 뜻있는 젊은 농민층은 자기 소유의 임야가 없다보니 선뜻 집단화된 호두나무 단지를 꾸리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올해 농협은 접목묘 3천주와 실생묘 1천5백주에 대해 80%를 보조하며 묘목을 분양했고 시는 지역우량묘 1만주를 1백% 보조해 광덕면 지장리에 식재한 상태다.
시와 농업관련 단체, 재배농가들 모두 광덕 호두를 살리고는 싶어하지만 서로 적절한 협조와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천안의 대표 이미지 호두, 시 전체가 나서야
충북 영동, 전북 무주 등의 호두생산량은 이미 천안을 앞서고 있다. 천안호두과자엔 천안호두가 없다는 사실은 감추고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안일하게 대처하고 적응하는 요 몇 년간 천안호두는 손 안에 쥔 마른 모래처럼 조금씩 퇴색해가고 있다.
현재 호두를 기업차원에서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는 SK임업을 제외하고 2003년을 기준으로 호두를 재배하는 농가는 총 130여 농가. 이중 124농가가 광덕에 있고 북면에 다섯 농가, 성남에 한 농가가 호두를 재배하고 있다.
호두가 천안의 가장 큰 이미지로 지속적으로 남기 위해선 생산자와 소비자, 농협, 천안시 등 모든 구성원들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9백년이 넘은 호두나무도 시비를 해주고 관리에 신경을 써주면 두 가마 이상이 생산된 예가 있다고 한다.
광덕면은 시가 자주 언급하듯 천안시민의 휴식처이며 전국 최초로 호두가 심어진 유서 깊은 땅이다. 공주의 경우 지자체와 농민들이 정책적으로 밤에 투자하다보니 '공주 정안 밤'이라는 예전엔 없던 최고의 히트상품이 만들어졌다. 호두는 현실이야 어쨌든 천안이 가진 최고 브랜드임에 틀림없다.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마당에 있는 이미 갖고 있는 최고의 브랜드를 죽여 간다면 지역농정의 존재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재배농가의 열정, 시의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지원, 농협의 적극적 협조에 지역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뒷받침 될 때 천안호두의 명성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