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말을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간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다 책이 많은 집에 가면 여지없이 책 한 자루를 지고는 못 와도 읽고는 온' 소녀가 있었다. 시인 황인숙의 소녀 시절 모습이다.
그녀가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이란 특별한 서평집을 내었다. '황인숙의 엉뚱한 책읽기'라는 도움말이 붙어 있다. 왜 엉뚱한 책읽기인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서' 혹은 '정통 방식이 아니라서' 그렇단다.
'책읽기의 흔적을 남기는 일의 무게를 덜고자 부러 딴청을 하고 한눈을 판 소치'라고 하는데, '흔한 음식과는 읽는 맛이 특별한 서평'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독자에게는 책값 9000원만으로 오래오래 곱씹을 수 있는 특식인 셈이다. 그녀는 어쩌면 스승인 오규원 선생의 강의 때 말을 빌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기억에 의하면, 그녀는 볼 때마다 상큼하고 미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산딸기 향기가 흘러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이따금 황인숙 시인의 마력을 생각하면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떠오르고, 강금실 전 법무장관의 마력(TV 뉴스에서만 보았지만 그녀에게서도 역시 상큼하고 미묘한 마력이 느껴진다)을 생각하면 황인숙 시인이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관련짓게끔 만든 기사는 황인숙의 수필집 <인숙만필> 서평 중에도 있다.
황인숙 시인(45)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호기심 많고 착해 보이는 눈길, 만년 문학소녀 같은 긴 머리와 옷차림, 천연스럽고 다정한 말투…. 강금실 법무장관은 가장 친한 친구로 그를 꼽았고, 시인 김정환은 초면에 '사슴'이라 칭했으며, 소설가 서영은은 '시인이 된 총무형 수녀'라고 촌평했다. -2003년 5월 3일자 <경향신문> 한윤정 기자의 서평 '엉뚱하고 천진한 생활의 발견' 중에서
변호사 친구가 청와대로부터 법무부 장관 제의를 받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황인숙씨는 이렇게 조언했다. "네 순수함이 사람들을 감염시킬 거야. 망설일 것 없이 정부에 들어가. 그리고 이걸 게임이라고 생각해 봐. 네 순수함이 얼마나 퍼져나갈 수 있는지. 그 사람들한테 얼마나 스며들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게임."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황인숙씨가 도란도란 얘기하는 자리에 끼었던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의 전언이다. -2003년 5월 7일자 <한국일보> 김지영 기자의 서평 '여유와 정겨움 묻어나는 생활풍경' 중에서
"휴대폰 안 가지고 있는 것도 권력이다"
황인숙 시인과 통신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일반 전화기 앞에 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동통신 단말기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생각났을 때 전화를 걸어 통화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셈이다. 나 역시, 작업실로 몇 번 전화를 넣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이거나 취침중이거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침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을 펴낸 이다미디어 박금희 이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 통화를 했는데, 10월 26일(화)에 신촌의 문화공간 '向'에 나올 것이니 그날이 괜찮으면 거기서 만나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여럿 나와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인 모양이다.
"현대백화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오르막길에 버스 정류장이 나와요. 거기서 조금 더 가면 SKT 대리점이 있고, 거기서 우회전하면…."
"현대백화점에서 왼쪽으로 가지 않나요?"
"오른쪽이죠. 홍익대 쪽으로요."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내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현대백화점 쪽으로 빠져나왔다. 현대백화점을 바라보며 '그래도 왼쪽이 맞다' 고집하고는 왼쪽으로 걷다 보니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들이 즐비하다. SKT 대리점도 눈에 띈다.
'그럼 왼쪽이 맞잖아'하고 중얼거리며 오른쪽으로 돌다 보니 "어, 이상하다?" 소리가 나온다. 조금 전에도 현대백화점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돌아간 셈이 아닌가. 어디에 서서 어느 방향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위치는 정반대로 가기 마련인 것이다.
방향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는데, 황인숙 시인을 만나러 가는 공간의 이름이 '向'이니 그것 참 공교롭다. 20평쯤 되는 공간 안으로 들어서니 벽면에 예술사진이 많이 붙어 있고, 한쪽 자리에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다. 그 중에 황인숙 시인도 있다. 그녀, 너무 단정하다 싶을 만큼 살포시 미소짓는다.
황 : "이렇게 만나네요."
김 : "20년 됐죠? 졸업하고 처음이니까. 그래요, 내가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광화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죠. 너무 청순하게 걸어가는지라 말을 걸지 않았지만."
황 : "얘기하지 그랬어요."
그녀와 나는 문예창작과 동기동창생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학번으로 보면 그녀가 나보다 3년 선배다. 이창기의 <스무 살의 수사학> 서평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보면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올해는 다행히도 따뜻했지만, 대학 입학 학력고사, 요새는 수능이라 불리는 시험을 보는 날이면 유난히도 날씨가 춥다는 징크스가 있다. 내가 그 시험을 본 날도 지긋지긋하게 추웠었다. 그때 내가 제 학령보다 두세 살만 더 많은 나이였어도 시험 보러 가기를 오직 추위 때문에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다섯 살이나 더 많았기 때문에 시퍼렇게 언 얼굴로 꾸역꾸역 시험장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김 : 초등학생도 가지고 다닌다는 휴대폰이 없네요?
황 : "휴대폰 안 가지고 있는 것도 권력이다" 그랬더니 소설가 조선희씨가 "상이군인 같은 권력이다"라고 하던걸요.
우리가 못 느꼈던 '새로운 깨달음'
그녀는 일상에 치어 살면서 못 느꼈던 '새로운 깨달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복거일의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깨끗한 들깨> 서평 '시간의 압제에 맞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얼마 전에 택시를 타고 가면서 택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내가 예순 살이 좀더 돼 보이는 그와 서로 '아줌마', '아저씨'라고 칭하고 있는 데 대한 감상이었는데, 이제는 그쯤 나이가 드신 분과도 대등하게 말을 트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으니 착잡하기까지 했다.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 전혀 우스개가 아닌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분의 나이는 내 나이의 스무 배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열 살일 때는 세 배, 스무 살일 때는 두 배, 지금은 한 배 반, 이런 식으로 그 분과 나의 나이 비율은 점차 낮아진다. 까마득히 어른으로 여겼던 선생님들, 친척들을 어느 날 문득 같이 늙어간다고 느끼게 되는 연유가 거기에도 있을 것이다.
김 : 시상이 떠오를 때 어떻게 해요?
황 : 그때그때 메모를 해야 생산력이 높은데 이제는 그게 안 돼요. 게을러졌어. 청탁이 오면 그때 비로소 써요. 집중력으로.
김 : 날씬하기가 여전하신데, 운동 뭐 하나요?
황 : 그렇지도 않아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 살이 자꾸 쪄요. 그래서 걷기운동 많이 하고, 헬스클럽 가서 러닝머신도.
케이트 쇼팬의 <이브가 깨어날 때> 서평 '결혼한 여자,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는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를 좀더 잘게 나누면, 세상에는 결혼이라는 틀이 체질에 맞지 않는데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기를 잘한 결혼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상대였으면 좋았을 결혼을 한 결혼한 사람, 그리고 결혼하면 좋았을 결혼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길 잘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러한 논리를 읽어가다 보면 참 참을성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바라볼 때 참을성이지 사실은 그만큼 차분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그녀의 '체질'이 아니겠는가.
김 : 결혼 안 할 거예요?
황 : 응. (잠시 쉬었다가) 프로포즈는 있었지만 거절했지요. 후후.
김 : 순수한 미소, 소녀 같은 말투 때문인지 성녀(聖女)처럼 보입니다.
황 : 성녀는 석녀(石女)와 읽는소리가 같아요. 후후후.
우스갯소리도 더러 하는 그녀는 이따금 편안한 친구 모임에 나간다.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어울려 술도 마시고 즐겁게 얘기도 하는 '번개' 같은 모임이다. 그리고, 책 읽는 데 시간을 보낸다.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은>은 모두 5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막의 꿈' '행복하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사랑도 없이 돈도 없이'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 '착한 사람의 행복을 위한'. 이 속에다 모두 서른여덟 가지 서평을 담아 놓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가 신경숙의 <자거라, 네 슬픔아> 서평 '물웅덩이 속으로 비치는 야릇한 하늘'의 첫 마디는 '제목 좋다!'다. 나도 한마디 하겠다. "시작 좋다!"
사진작가 구본창의 사진과 신경숙의 글이 만났다. 잘 만난 거 같다. 그들의 사진과 글은 서로의 슬픔을 깨우고 다독거리며 아름다운 이중주를 들려준다. 책을 곰곰 들여다보면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고집스레 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이중주가 화성을 이루는 건 신경숙 글과 구본창 사진이 비슷한 정조, 비슷한 어조여서일까?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조은의 시집 <따뜻한 흙>의 서평 '몸으로 다다를 수 있는 세계'에서는 조은의 마음 색깔까지 읽어놓았다.
<따뜻한 흙> 표지를 본다.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니 보면 볼수록 제목에 걸맞는 색깔이다. 녹색 테두리 안의 노르스름한, 따뜻한 흙 같은 색깔. 조은은 따뜻한 흙 같은 사람이다.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은> 속의 글들은 다른 서평과 읽는 맛이 확실히 다르다. 읽기 편안한 문체로 자신의 삶과 사색을 섞어서 좋은 책의 참맛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그 책에 대한 촌평도 더불어 써 놓았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다정하면서 지적인, 또 잔잔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소설이다.
<멋진 한 세상>은 남자로부터 보호, 혹은 보조를 받지 못하는 여자 가장의 가난과 고독이 주조를 이루는 책이다.
<거세된 희망>은, 불결하고 불편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빈민촌의 주거 환경과 열악하기 짝이 없는 조건의 일자리를 그것도 어렵사리 얻는 빈민들, 정부와 공공 기관과 용역 회사가 결탁된 부조리한 취업 구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식들이 이런 삶을 벗어나게 해주지 못할 것 같은 그들의 절망스런 상황 등에 대한 폴리 토인비의 생생하고 '쿨'한 체험담이다.
<나를 부르는 숲>은 미국인과, 관광지가 아닌 자연으로서의 미국 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역사 앞에서>는 한 개인의 삶의 기록이 곧 역사인 진경을 보여준다.
<사랑의 학교>는 특히 학교 선생님들이 두루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중략) 모든 달들의 책이면서 특히 5월의 책이다.
김 : 그 서평들을 연재한 매체가 사보기 때문에 서평으로 다루지 않았을 책들도 있을 테지요. 최근 감명받은 책들 좀 소개한다면?
황 : 서준식의 <옥중서한>, 정수일의 <이슬람문명>, 박진숙의 <혜초일기>, 사진가 최민식 선생과 조은 시인이 만난 사진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김 : 만화도 좋아한다고 아사다 지로 <장미도둑> 서평에 나와 있던데요. 어떤 종류를 특히 좋아하죠?
황 : 순정, 코믹, 추리….
일본만화의 거장 중 한 명인 가와구치 가이지가 작년에야 비로소 9년간의 연재를 마치고 일본에서 전32권으로 완간한 본격 군사만화 <침묵의 함대>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했다. 그 밖에 코믹조폭만화 <차카게 살자> <키드 갱>, 허영만의 <타짜>.
"앞으로 시인은 차츰 없어질 것이다"
그녀는 오규원 선생에게서 배운 시 학습을 잊지 못한다. 최상급 교수에게서 시를 배울 수 있었다는 추억과 은혜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김 : 그때 수업 시간에 내가 '전화번호부 속에서'라는 시를 썼는데, 이것은 시가 아니라며, 만일 시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변호해 보라고 하셨죠. 그랬더니 시 잘 쓰는 양선희씨가 일어나 변호했었요.
황 : 변호를 듣고 나서 "꿈보다 해몽이 좋네" 그러셨겠네. 후후후.
김 : 맞아요, 꼭 그러셨지요.
김 : 시인 지망생들에게 시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될 말 좀 해줘요.
황 : "음악을 많이 듣고, 많이 걸어라." 그런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황 : 앞으로 시인은 차츰 없어질 거야. 시로 살지는 않아도 다른 형태의 장르 안에 시가 녹아들어 있지요. 시의 원형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시집 시장은 차츰 사라지지 않을까요? 사실 시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잖아요? 국악하는 것처럼 인간문화재와 다름없이 되겠지. 아직 (시인이) 있다는 게 대견해요.
"그 말 어디 문예지에서 한 적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한 적 없다"고 했다.
김 : 우리 때는 시인과 소설가 되겠다고 문예창작과에 들어온 학생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방송작가나 팬터지 소설가가 되겠다고 문예창작과 가는 학생들이 늘어났어요.
황 : 많이 가면 자연스럽게 격이 높아질걸요, 그 장르도. 시도 처음부터 잘 쓴 건 아니었잖아요.
걷기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이 동생 나이의 남자 동기생을 바래다준다며 인천까지 가는 직행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 주었다.
김 : 요즘 음악 뭐 들어요?
황 : '집시의 시간' '데오도라키스'. 옛날엔 칸초네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 '마음은 집시'.
상큼하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웃어주는 시인의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의 책읽기 성향이 여러 갈래인데도 서평이 가지런하고 차분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