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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론, 국방부도 인정한 언어도단
윤광웅 국방장관이 내년 1월 발간 예정인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한 문구를 완전히 삭제할 것을 강력히 내비쳤다고 한다. 윤 장관은 “주적 개념을 적용하면 남북간의 관광이 가능하겠느냐. 국방부 본부에서 국방정책을 마련하는 요원들이 융통성이 없어서(주적을 설정했다). 국방부가 주적을 표현한 건 언어도단이다. 외교 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곳에서 얘기해야 할 사항이다”며 주적론이 시대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주적 표현 자체가 언어도단임을 자인했다.
주적론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끊임없이 논란이 됐지만 그때마다 수구 언론은 안보를 내세워 강력히 반대의 뜻을 펼쳐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주적론에 매달리는 세력들
설령 다른 정부 부처가 주적 개념의 문제를 제기해도 군은 마지막까지 이를 고수해야 하는 집단인 것이다. 그런 조직의 수장(首長)이 스스로 주적 개념의 폐기를 들고 나왔으니 당장 군의 정신무장 태세에 손상을 끼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 동아일보 11월 18일자 사설 <主敵 개념 폐기 서두를 때 아니다> 中
문제는 왜 국방장관이 이런 식의 발언을 해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보안법 문제로 안보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높아진 상황에서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국방장관이 '북한=주적 폐지'라는 이슈를 들고 나온다면 국민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 중앙일보 11월 18일자 사설 <'주적 폐지'하자는 국방장관의 안보관> 中
“주적 개념을 적용하면 남북 간의 관광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 윤 국방장관의 말처럼 주적론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군사,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발전하고 있는 화해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뿐만 아니라 남북간의 국방장관회담에 이어 서해 북방한계선(NLL) 상에서 우발적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한 함정간 핫라인이 가동되고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선전 수단이 제거되는 마당에 주적론은 어울리지 않는다.
주적 개념의 폐기가 안보 불안이나 군의 정신 무장에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희박하다. 주적이라는 개념은 1995년 국방백서에서부터 쓰인 개념인데 그렇다면 95년 이전에는 국민들이 안보 불안을 느끼고 군의 정신 무장 태세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인가.
안보 불안 심리로 주적론을 옹호하는 냉전 언론
하지만 냉전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들은 안보 불안감을 부추기며 주적론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보안법 개폐(改廢) 논란 등으로 안보불안 심리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상태다. … 그러나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어설픈 조급증은 오히려 화(禍)를 부를 수 있다. - 동아일보 11월 18일자 사설 <主敵 개념 폐기 서두를 때 아니다> 中
지금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전력 공백 위험이 크다. 또 북핵 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도 있다. - 중앙일보 11월 18일자 사설 <'주적 폐지'하자는 국방장관의 안보관> 中
이종석 NSC 사무차장이 "전 세계적으로 위협 대상을 주적이라고 한 나라는 없다"고 지적한 것처럼 탈냉전시대에 어느 나라도 특정 국가를 주적으로 지칭해서 방위 전략을 펴지 않는다. 주적 개념을 폐지하는 것이 안보 불안으로 이어진다면 주적 개념을 명시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은 모두 안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국가보안법 개폐로 인한 안보 불안이나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전력 공백 역시 잘못된 결론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오히려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져와 평화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다. 또 신속·기동군으로 전력이 증강·재편되는 주한 미군의 재배치를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공백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적으로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대만이나 중국을 비교해 봐도 주적 개념은 분명히 무리가 있다. 내부적으로 중국을 ‘가상적(敵)’으로 지칭하고 있는 대만에서도 외부 문서에서 주적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국들을 형식적으로나마 평화 협상의 대상으로 간주해 적대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 사례를 보아도 주적 개념과 안보는 별개의 문제다.
냉전적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
하지만 주적 개념을 고수하기 위해 보수 언론들은 어설픈 논리까지 동원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국가안보에 앞서 남북관계를 우선시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동아일보 11월 18일자 사설 <主敵 개념 폐기 서두를 때 아니다> 中
윤 장관은 '어느 날 갑자기 주적 개념을 넣은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이를 빼려는 것도 문제 아닌가. - 중앙일보 11월 18일자 사설 <'주적 폐지'하자는 국방장관의 안보관>
국가안보와 남북관계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는 동아일보의 시각이야말로 냉전적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개설된 핫라인이 서해에서의 무력 충돌 위험을 줄여 주는 것처럼 주적론과 같은 대립보다는 민족간의 화해와 교류의 확대가 오히려 안보를 담보할 수 있다. 느닷없이 들어간 주적론을 빼자는 것에 ‘갑자기 빼는 것이 문제’라는 중앙일보의 주장에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낄 수 없다.
주적론은 냉전의 산물일 뿐
애초부터 국방백서에 주적 개념을 명시한 것 자체가 냉전의 산물이었다. 주적론은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북측 대표가 “서울이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만다”는 발언을 문제 삼아 시작됐다. 당시 북 대표는 전쟁이 일어나면 민족이 공멸한다는 뜻에서 그런 발언을 했지만 냉전 세력은 이를 "서울 불바다"라는 선정적인 표현으로 공격적인 발언인양 왜곡했고, 이를 계기로 주적을 명시하게 됐다.
냉전의 산물로 탄생한 주적론은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이 화해와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긴장완화와 협력확대가 갈수록 절실한 마당에 언제까지 주적론이라는 허깨비에 매달려 민족의 단합을 저해할 것인가. 이번에야말로 냉전으로 회귀를 주장하는 언론에 휘둘리지 말고, 반드시 민족의 앞길에 놓인 주적론이란 걸림돌을 걷어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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