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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책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 문학과경계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복잡한 시는 딱 질색이다. 아무리 함축적 의미가 어쩌구, 시의 은유와 상징이 어쩌구 하더라도, 시는 짧은 언어의 나열 속에 깊은 의미를 갖고 있어야만 제맛이 난다.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또 많은 문학 평론가들께서 "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구만"하고 단정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짧은 시가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짧은 시는 순간순간 기분 좋은 느낌을 주며 '간결함의 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진영이 시를 쓰고 류연복이 판화를 찍은 책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는 이런 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다. 물론 실려 있는 시들이 짧다고 해서 의미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화보가 많다고 해서 아이들만을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내 소중한 친구 연복이의 도움으로 이 시집을 엮는다. 대체 나의 시는 나의 내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다시는 이런 시를 못 쓸 것 같다."

서문에서 시인이 던지는 말은 간결하면서도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드러낸다. '나의 시는 나의 내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다시는 이런 시를 못 쓸 것 같다'는 말에 아마도 많은 시인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한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글재주를 뽐내는 많은 이들, 혹은 '창작'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일을 하는 많은 이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가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도대체 내 글은, 그림은,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 욕구가 분출되어 나타나는 것이 글이고 그림이며 행동일 것이다. 그 글과 그림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에 그 표현물은 더욱 더 큰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감동을 주는 모든 표현물을 생성하는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어진다.

"바람/ 분다/ 댓닢들이/ 진저리를 친다" - 이진영의 시 <대숲에서> 전문

"제가/ 저를/ 찌르네/ 찌르는 것은 모두 사랑이네" - <가시나무> 전문


세상의 아픔에 대해 이처럼 간단히 노래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부는 날 진저리를 치는 대나무 숲,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모든 사랑. 간결한 몇 마디의 말에서 우리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이진영의 시가 슬픔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통해 느끼는 사색의 감정들 또한 간결함의 미학 속에 숨어 있다.

"살구꽃 피고 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밤마다 밤마다/ 몹쓸/ 새 피는 돌고/ 새 피는 뛰고" - <봄>

"나 이제 넘치는 강물 되어 너의 하늘로 돌아가리/ 너의 빈 하늘로 돌아가/ 장독대도 적시고 문지방도 적시고/ 대나무 창살도 적시고/ 방안에 서성이는 너의 영혼도 적시리" - <장마>


저자는 봄밤의 두근거리는 가슴 설렘을 살구꽃이 피고 지고 복사꽃이 피고 지면서, 밤마다 '몹쓸' 새 피가 돌고 새 피가 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손뼉을 탁 치게 하는 기막힌 표현인가. 봄밤의 잠 못 이루는 그리움과 가슴 떨림을 한순간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맛날 퍼붓는 비를 보면서 쓸쓸한 감상에 젖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창밖에 내리는 비는 '장독대도 적시고 문지방도 적시고' 방안에 서성이는 너의 영혼과 나의 영혼을 적시는 매개물이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젖은 영혼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 시집은 감상적인 이야기만을 늘어 놓는 책은 아니다. 삶의 강인한 정신 또한 시 속에 표현되어 있다. 시 <울지 않는 강>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의지적인 자아가 표출되어 있다.

"산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굽이치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바위 같은 가슴으로 견디고 견디는 일/ 오늘 좀 외롭고/ 슬프다고/ 함부로 울지 말아라" - <울지 않는 강>

이 시의 명령적 화법은 독자에게 던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집요한 열정은 사랑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자세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사랑한다는 말은 끝까지 너를 책임진다는 말/ 너의 슬픔과 희망과 절망과 눈물과/ 병과 죽음까지도 모두 사랑한다는 말/ 내 하나의 꽃이여" - <열애>

이 시집에 담겨 있는 모든 시들은 열행을 넘지 않는 간결한 형식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적 의미가 단순하고 짧은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느끼는 온갖 감정과 생각들은 간결한 시어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그 짧은 시어들은 다시 풍부한 의미가 되어 독자의 가슴에 남는다.

시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짧은 시로 구성된 시집을 통해 좀더 시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길 권하고 싶다. 시는 함축적인 의미와 상징, 그리고 간결한 형식을 통해 풍부한 삶의 의미와 해석들을 전달한다. 시의 간결함 속에서 긴 여운을 발견할 때, 한 권의 시집에 담긴 시인의 철학은 큰 울림으로 독자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 경계시선 32

이진영 지음, 류연복 판화, 문경(문학과경계)(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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