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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에세이스트의 책상>
책 <에세이스트의 책상> ⓒ 문학동네
"음악은 절대적인 것이고 죽음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죽음이나 덜한 죽음이 존재하지 않듯이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영혼의 등가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해서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두 곡을 듣는 것과 세 곡을 듣는 것을 더 적다, 와 더 많다, 라고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책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독특하다. 레즈비언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고 음악을 이야기한다는 게, 동시에 이 세 가지를 모두 말하는 것이 평범한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의 전개는 매우 매끄럽고 술술 읽히는 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사건 전개의 특이한 점은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독일을 배경으로 하여 한 한국인 작가가 이곳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사람을 만나는 과정은 마치 배수아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하다. 주인공이 만난 M은 병약하지만 풍부한 음악적 지식과 지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다.

주인공은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M을 소개받게 된다. 그녀는 언어학 전공자이지만 독특한 방법으로 독일어를 가르치는 M의 세계에 점점 애착을 갖고 빠져든다. 음악이란 어디까지나 세상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M을 만나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미학적 가치를 배운다.

"그런 이상하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여기 아이들은 금방 네가 콧대 높게 잘난 척한다고 생각할 걸. 그런 평가는 치명적이야. 여기는 아시아가 아니라니깐. 말없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막 웃으면서 열심히 끼어서 듣다보면 언젠가는 저들의 말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독일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느끼면서 일종의 고립감을 느끼던 주인공은 독일이라는 세계 속에서 고립된 채 사는 M의 모습에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추구하고 알레르기 등의 질병으로 인해 항상 집에만 머무르는 M. 그녀가 유일하게 위안을 찾는 대상은 바로 음악이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아주 희미한 빛이 집 안으로 숨어 들어와 말없이 고독하게 존재하는 사물들에게 최소한의 색과 소곤거림과 형체를 선물하는 듯했다. 장식이 하나도 없는 초록빛 벽과 닳아서 얄팍해진 작은 카펫이 깔린 좁은 복도, 우산과 구두를 넣어두는 간소한 벽장 문, 가구 닦는 왁스의 연한 냄새, 그리고 반쯤 문이 열린 채로 있는 카펫이 깔리지 않은 마룻바닥의 두 개의 방, 그 문 뒤편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 책장을 스치는 소리."

텅 빈 집, 낯선 곳에서의 나만의 고요한 공간,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 모든 고독감은 가끔 서글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사색으로 빠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내면의 고독을 충분히 음미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녀가 애정을 느끼게 된 대상은 바로 자국에서조차 이방인으로 남아 고독하게 살아가는 M. 이 둘의 만남은 독일어 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한다. 더듬거리면서 독일어 문장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주인공에게 M이 선택한 교수 방법은 바로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 채 어려운 책을 읽기 시작한다.

M의 앞에서 큰 소리로 책을 읽다 보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오고 그런 단어들에 대해 M은 설명을 펼쳐 놓는다. 주인공의 친구 요아힘은 M의 교수 방법이 말도 안 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녀가 슈퍼마켓의 설탕, 밀가루 등의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면서 대화의 중간 중간에 얼토당토않게 '상태의 견고한 묘사'나 '유아론'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M은 코웃음쳤으나, 나는 내가 기초적인 문법 훈련에 바탕을 둔 반복적인 언어학습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M은 내 요구를 무시하면서, 자신도 그런 식으로 해서 불어를 마스터했다고 주장하면서, 나에게 당장 시험에 붙지 않으면 돌아가야 하는 중국인 유학생처럼 촌스럽게 굴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 주인공은 점점 M의 매력에 매료되고 결국 그녀와 함께 지내게 된다. 병약하고 고독하며 죽음을 앞둔 채 기다리고 있는 M. 그녀의 유일한 안식인 음악을 함께 들으며 고요하게 부유하는 먼지들과 조용한 방을 함께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때 나는 행복했던가. 그 기간이 섬광처럼 짧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단지 M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긍정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헤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단지 화석화된 기억 속에 머물 뿐이다.

M은 분명 그 기억 속에 존재하나 또한 그 속에 존재하는 것은 M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 있는 M은 시간과 함께 점점 더 M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체온이 없고 대답하지 않으며 나를 보지 않으며 M과 같은 모습을 하고 M과 같은 옷을 입고 M의 흉내를 내면서 움직이고 있으나 천박하고 무의미했다."


이 책의 내용은 주인공이 M과 헤어지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독일에 가 그녀와의 일을 하나씩 회상하는 방법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이 M과 헤어지게 되는 가장 큰 계기는 M이 던진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저 호기심 때문에 M이 어떤 남자와 잤었다는 얘기를 듣고 주인공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많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떠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M 또한 엄청난 상처를 입고 배신감을 느낀다. 모든 헤어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작든 크든 상처를 입히면서 끝나게 되어 있다. 떠나는 자도 남는 자도 모두 이런 상처의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너무 짧은 기간 안에 열중해버린 M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았던가? 너무 오래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그것에서 잠시 멀어져 있고 싶지 않았던가? M이 베를린에서 홀로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사랑 안에서 그렇게 홀로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사랑 안에서 그렇게 홀로 남게 되는 것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고통이 수반되는 과정이다. 헤어짐도 고통이지만 사랑 또한 고통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 있는 것도 고통이 따른다. 세상의 모든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이별에서 인간은 고독을 느끼기도 하고 고통을 느끼기도 하며 성숙해 간다.

그 성숙과 아픔의 과정을 그려낸 이 책은 레즈비언의 사랑, 독일을 배경으로 한 독일인과 한국인에 대한 묘사 등으로 독창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레즈비언의 사랑이 지니는 특이함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일반적인 모든 이들의 사랑과 이별을 묘사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에 보편적인 미학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만약 사랑의 의미나 이방인이 느끼는 고독감,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가치, 죽음의 허무감 등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의 서술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묘사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이국적인 편이라 약간의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이질감 속에서 사랑의 의미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찾아본다면 책은 큰 의미로 독자에게 다가올 것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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