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LA 발언'이후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한미정상회담은 일단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 이후 처음 만난 두 정상은 북핵 문제를 최우선적인 해결 과제로 삼고 6자회담의 틀 내에서 평화적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는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려했던 긴장은 일단 누그러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6자회담의 일원인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위해서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노 대통령의 주장에 부시 대통령이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해, 2기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유연해질 수 있음을 내비쳤다. 뉴욕타임즈는 이를 부시 행정부가 "약간의 신축성"을 보인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부시의 대북정책이 바뀌고 있다거나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이 보장된 것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두 정상이 합의한 것은 구체적인 방안이 아니라 한미공조를 바탕으로 6자회담 틀에서 평화적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이전에도 많이 나왔었다.
부시, 중동 문제를 의식한 듯
일단 부시가 과거에 비해 유연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외교안보팀이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등 6자회담 참가국들과 갈등을 빚는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도 미국의 자세 변화를 촉구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부시가 기존의 강경기조를 계속 유지할 경우 6자회담 구도에서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APEC 회의에서 나타난 '부시의 유연화'는 한국이 '북핵 기조'를 명확히 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천명하고,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도 미국을 설득한 것에 따른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미국의 대북정책이 변화한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에는 보다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미국 안팎의 정치적 환경에 따라 바꿔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부시 행정부가 재선에 성공한 직후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쪽은 이라크 등 중동이다. 부시 행정부는 내년 1월 이라크 총선을 앞두고 이라크 저항세력을 척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팔루자 점령 및 북부 이라크로의 진격 등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야세르 아라파트 사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 미국이 적극적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는 국제여론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북한,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란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기 위해 외교적인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최근 유럽연합(EU)의 트로이카인 영국-프랑스-독일이 중국 및 러시아의 지원 속에서 이란과 합의한 내용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추가적인 이란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계속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이에 따라 동북아의 상황이 악화되고 아시아의 동맹·우방국들과의 관계가 흔들릴 경우, 2기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전부터 부시는 외교적인 곤경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 후진타오 주석, 고이즈미 총리, 푸틴 대통령 등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국 정상들을 줄줄이 만나야 했던 부시 대통령은 '6자회담의 안정적인 관리'를 목표로 유화적인 제스처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 부시에 파병 연장 약속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부시 행정부는 "약간의 신축성"을 보여줌으로써 추가적인 상황 악화 방지 및 6자회담에서 미국의 고립화를 일정 정도 제어하고 "공을 북한으로 넘겼다"는 주장을 펼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
특히 '정치적 수사'의 신축성과 '정책'의 신축성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정책의 변화 여부는 한미간의 정책 조율 및 차기 6자회담에서 내놓을 미국의 새로운 제안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유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북한에게 요구한 내용은 강경 일변도로 나간 바 있다.
무엇보다도 부시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이라크 문제에 대한 한국의 지속적인 협력을 약속 받았다. 이라크 파병에 대한 부시의 사의 표명에 대해 노 대통령은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조속한 재건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말해 이라크 파병 연장을 약속해주고 만 것이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약간의 신축성"을 보인 미국의 태도를 근거 삼아 파병 연장을 강력히 추진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한국의 파병 연장에 쐐기를 박은 동시에, 향후 한국의 파병이 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예고한 회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파병의 늪'에 나머지 한발마저 담그려고 하는 정부에 대해 국회와 국민 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넓어진 한국 외교의 공간
노무현 대통령의 'LA 발언'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나온 최대의 성과는 한국의 외교적 공간이 넓어졌다는 점에 있다. 노 대통령과 만난 후진타오 주석도 "한국의 건설적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1기 부시 행정부 때에서는 미국의 선의를 기대하면서 한미공조에 '올인'하다시피 한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이다.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 유화 제스처와는 달리 구체적인 해법에 있어서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경우 4차 6자회담에서도 이렇다할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향후 한미공조의 방향은 미국이 지난 3차 6자회담에서 내놓은 제안을 대폭 변경시키는 것에 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제안에 한국의 제안을 반영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이 치밀한 제안을 만들어 미국을 견인시킬 수 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재가동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미공조 못지 않게 남북관계와 주변국 외교도 중요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누적되어온 남북한의 불신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하루 속히 남북한의 신뢰를 회복하고 핵문제를 포함한 평화문제를 남북한이 상의할 수 있는 질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대북특사 파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6자회담과 남북관계가 선순환적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남북정상회담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대단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북아 국제관계의 긴장과 협력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북일수교와 미일동맹 강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일본이 북일수교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북일 양국을 설득해야 하고, 한반도 비핵화-북한의 붕괴 방지-한반도 전쟁 예방이라는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 러시아와의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이들 나라는 미국이 제공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인센티브를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향후 한국 외교의 지평은 미국 못지 않게 중국·러시아·일본, 그리고 EU로까지 다변화 정책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기회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이 실패할 경우 위기의 크기도 커지기 마련이다. 노무현 정부가 지나치게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고무되지 말고, 냉정한 현실 인식과 치밀한 전략 마련을 통해 '대전환'을 도모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