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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입 짧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꽤 여유가 있어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입이 고급이 된 것이 아니라, 바쁜 생활에 끼니를 놓치다 보니 속은 물론 입맛까지 버린 친구들입니다. 남들은 한창 부모님 곁에서 공부할 시기에 사회생활부터 시작했던 친구들이라 어지간한 식당 밥에는 넌더리를 내는 이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별다른 불만을 달지 않고 찾는 식당이 하나 있습니다. 벌써 드나든 지 10여 년을 훌쩍 넘긴 순대국(표준어는 순댓국이지만 흔히 쓰는 표현대로 순대국으로 쓰겠습니다) 집입니다.
서울 구로역 애경백화점에서 구로동 안쪽으로 두 정거장 더 들어오면 구로소방파출소가 있는데, 그 건너편에 구로중앙시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중앙시장'이지 열댓 집 정도의 이런 저런 가게들이 모여 있는 조그만 골목입니다. 그나마 대형 백화점과 할인매장들의 융단폭격에 문을 내린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골목 제일 안쪽에 전형적인(?) 장터 국밥집의 모습을 한 '특미 순대국' 집이 있습니다.
이곳의 특징은 순대국 특유의 비린 맛이 없다는 점입니다. 순대국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약간 비린 듯한 특유의 냄새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순대국을 즐기는 '마니아' 중에는 그 특유의 냄새가 바로 순대국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 '특미 순대국' 집에서는 이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24시간 푹 고아낸 돼지 사골 국물은 결코 비린내가 나지 않아 가끔은 다대기를 넣지 않고 설렁탕 먹듯 먹기도 합니다. 젊은 여성이나 어린아이들도 부지런히 국그릇을 비워내는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합니다.
맛 집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듯 큼직한 깍두기를 올려 한 입 밀어 넣으면 고소하고 진한 맛이 입 안에 퍼집니다. 머리고기는 국물을 만들 때 쓰지 않고 따로 삶아서 고명으로 내오는데, 역시 부드러운 맛이 일품입니다.
문득 맛을 글과 사진으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식당의 맛은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말해주지 않나 싶습니다. 점심시간이면 근처 구로구청과 경찰서, 병원, 은행 등등 일대 많은 직장인들로 가뜩이나 좁은 가게 안이 지나다니기가 버거울 지경입니다.
그 중에는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서도 점심시간만 되면 택시를 타고 달려와,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우곤 다시 눈썹이 휘날리도록 직장으로 달려가는 '충성파' 단골 손님도 있다고 주인 아주머니는 귀띔해 주십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워하는 눈치입니다.
때문에 정오 무렵은 실내에 있는 여섯 개의 테이블과 얼마 전 포장을 설치해 실외에 마련한 두 개의 테이블로는 오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도 이 집은 큰 평수의 가게와 화려한 실내장식을 외면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시골장터다운' 분위기 또한 손님들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곳은 다른 분이 이십여년 넘게 경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람과 술을 너무 좋아하던 주인 아저씨가 몸이 안 좋아져 요양을 가는 바람에, 고향 동생에게 만드는 비법과 함께 가게를 맡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 아무리 정확하게 전수를 해 주어도 원래 주인의 손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인데, 이 집은 각고의 노력 끝에 3년여를 경영해 오며 '부족한 2%'를 채운 경우에 속합니다. 덕분에 기존 단골도 잃지 않고 새로운 손님도 쏠쏠히 늘고 있습니다.
기사를 쓰는 저 자신도 그곳을 다닌 지 십여년이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경우에는 점심식사 보다는 어두운 저녁,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기 위해서 이 집을 찾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펄펄 끓는 뚝배기 술국에 우선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청양고추를 듬뿍 넣은 후 매운 다대기로 마무리를 합니다. 그리고 술 한 잔을 털어 넣은 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따끈한 국물의 맛은 한 마디로, 짧은 글 실력으로는 표현키 어려울 정도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도 여행 중 만나게 되는 너른 들판이나, 한적한 국도변의 초가집 풍경에서 마치 고향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각진 빌딩 틈 사이에서 힘겹게 호흡해 오던 도시인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겁니다. 그건 아마 약간은 낡은 듯, 조금은 부족한 듯해도 오히려 그 빈틈이 내 일상의 메마름을 채워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6시 내 고향>을 보며 미소 짓고, 그 안 시골장터의 가보지 못한 국밥집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좁은 식탁, 삐걱거리는 작은 의자지만, 그 안에서 옛 시절을 추억하며, '호호' 불어 먹는 따끈한 국물의 온기를 그리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집은 날이 차가워져 가는 요즘에 더욱 정겹게 느껴집니다.
점심시간이 주변에 위치한 넥타이맨들의 차지였다면, 저녁은 손톱 밑이 까매지도록 육체 노동에 시달린 이들의 공간으로 변해 갑니다. "아시바(비계)를 타다 6층 밑으로 떨어질 뻔 했다"는 목수의 넋두리와 "아농(화공약품) 냄새에 술 안 마셔도 취해 지낸다"는 인쇄공장 공원(工員)의 한숨이 진하게 울려 퍼집니다.
취재(?)를 위해 찾은 지난 23일 저녁, 그런 그들을 보고 있다 문득, 안 좋은 일 때문에 실의에 빠져 하루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는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전화를 하니 역시 반쯤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세상만사가 귀찮다고 합니다.
"그럼 집에 있어라. 참, 여기 순대국 집이야."
잠시 후, 득달 같이 달려 온 친구가 국물까지 추가로 청하고, 눈물 콧물 흘려가며 정신없이 퍼 먹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때려 죽여도 안 나올 놈 같더니, 잘만 먹네."
잠시 숟가락질을 멈춘 친구가 소매로 코 밑을 쓰윽 닦더니 말합니다.
"몰랐냐? 나 여기서 밖에 안 먹잖아."
거나하게 취해 가는 이들의 욕지거리가 푸짐해지고, 주인 아주머니는 식은 술국에 국물을 부어 다시 데우기 시작합니다. 어려운 경기에 일인분 6000~7000원의 삼겹살도 부담스러운 이들이, 5000원 술국 한 그릇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모습이 어둠 속에 묻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