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국무총리의 머리에서 나온 한국형 뉴딜정책이 좌초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와 여당을 제외하고 전적으로 찬성하는 세력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권은 물론 노동계, 시민단체도 연기금을 동원한 한국형 뉴딜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심지어 여권 내부에서조차 쓴소리가 터져 나올 정도다. 한마디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는 셈이다.
연기금 투입·운영방식, 정부-여당 빼고 모든 세력 반대
[연기금 투입방식 논란]정부의 한국형 뉴딜정책 가운데 집중 포화를 받고 있는 부분은 한국형 뉴딜정책의 재원으로 연기금을 활용하는 경기부양방식이다. 특히 '국민 통장' 국민연금을 SOC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정부의 구상은 정부의 정책발표 직후부터 논란이 대상이 됐다.
정부의 연기금 동원방식에 직격탄을 날린 주인공은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 이는 이헌재 부총리를 필두로 한 경제부처의 독주에 제동이 걸린 첫 번째 사례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19일 김근태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경제부처가 국민연금의 용처에 대해 앞서서 주장하면 '내가 낸 돈을 정부 마음대로 하는 것 아냐, 그래서 결국 원금도 못 받는 것 아냐'하는 의구심과 불신이 증폭된다, 신뢰가 훼손된다"며 경제부처의 국민연금 동원 방식을 강력히 비판했다.
김 장관은 "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민연금을 책임지고 있는 우리 보건복지부는 연금운용의 기본원칙, 즉 안정성, 수익성, 공공성의 3대원칙을 확고히 견지할 것"이라며 "대형 SOC 투자 등 사회적 논란이 많은 투자일수록 3대 기본원칙을 충실히 견지하겠다"고 말했다.
한쪽 분량에 달하는 이 성명은 여당이 걷잡기 힘들 정도의 후폭풍을 낳았다. 시민단체와 야당은 즉각 환영을 뜻을 표시하며 김근태 지지론을 폈지만 정작 여당 지도부와 경제부처는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을 표시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정치적 해석을 가미시켜 대권론 운운하며 폄하하기에 바빴다.
반면 경실련, 참여연대 등은 김근태 복지부 장관의 문제제기가 타당하다는 논평을 내거나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민주노동당도 "기금관리기본법의 개정을 통해 연기금을 경기부양을 위해 투입하겠다는 정책의 위험성을 누차 경고해왔다"면서 김 장관의 지적을 "당연하다"고 평가하며 지지의사를 밝혔다. 한나라당도 "김근태 장관의 말이 정답에 가깝다"며 환영했다. 일단 연기금의 독립성을 강화하기로 결정하며 봉합이 되긴 됐지만 여진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다.
고속도로 등 주요 SOC 민간 매각땐 통행료 인상 불가피 지적도
[SOC 민자유치 공공성 훼손논란] 뿐만 아니라 연기금이나 민간 재무적 투자자에 주요 국책사업을 넘기겠다는 경제부처의 발상은 노동계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고속도로 민자유치와 관련해서는 한국노총과 한국도로공사 노조가 제동을 걸고 있다.
한국도로공사가 발행하는 ABS(자산유동화채권) 등 채권에 투자해 충분히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데도 굳이 직접 투자 방식을 고수하는 정부의 뉴딜 정책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 노동계의 주장이다.
오현수 도로공사 노조위원장에 따르면, 정부의 고속도로 민자전환의 뼈대는 대표적 흑자 노선인 경부선·중부선·영동선 등 국고노선을 민자나 연기금에 넘겨 수익률을 보장하는 방안이라고 한다. 지역노선 대다수가 적자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이를 민자에 넘기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민자나 연기금이 투입될 수 있도록 9조원의 매각대상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위에서'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오 위원장은 전하기도 했다.
특히 오 위원장은 국고노선의 민자전환이 제2의 인천공항고속도로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가의 통행료를 지불하는 사태가 불가피하는 것이다. 오 위원장은 "정부의 계획대로 8%의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통행료가 지금보다 3∼5배 가량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렇게 될 경우 국민들은 국민연금에 돈을 내고도 고가의 통행료를 물어야 하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특혜시비 불구 정부·여당은 야당·시민단체 의견 무시
[기업도시 특혜 논란]기업도시 건설은 일찌감치 민주노동당과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과도한 특혜 조항 때문이다. 개발이익 환수방안의 미비, 토지수용권의 민간 부여 등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지만, 재계의 요구에 경도된 정부와 여당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기업도시특별법 저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연대·환경비상시국회의 등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기업도시특별법 제정강행은 자신들이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라고 얘기해 왔던 소수의 재벌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기 위해 공정한 경제활동, 교육 및 의료 등 공익성, 노동권, 환경보호 등 국민경제 전체의 공익을 포기하는 행위"라며 제정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또 "도시를 짓기 위한 수 십조원의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재벌들은 거의 없으며 결국 자기자본없이 은행돈으로 도시를 짓게 될 것"이라며 "이는 금융권 부실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고 금융권 동반 부실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거대 토목사업을 통한 경기부양이 우리나라 산업구조를 약화시키고, 결국 국가산업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민감한 조항은 건드리지 않고 "시민단체의 의견은 충분히 수렴했다"(이강래 열린우리당 의원)고만 주장하고 있다. 재벌특혜법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서도 "일부 특례 조항은 인센티브로 이해해 달라"(이헌재 경제부총리)며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수도권과 충청권 일부를 제외하고는 개발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재계쪽의 주장을 인용하며 개발이익환수 미비론을 일축하기까지 하고 있다.
일부 이론을 제기하는 여당 의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건교위 소속인 김동철 열린우리당 의원은 24일 기업도시법 공청회에서 "경실련이 말한 것처럼 기업의 투자를 통해 산업단지를 만드는 것이 맞다"면서 "부동산 이익을 노리는 것은 철저히 막아야 한다"고 다른 목소리를 냈다.
구체적 대응책도, 후속대책도, 내부조율도, 전무했던 부실정책이 화 키웠다
[예고된 반발 원인과 대안은] 한국형 뉴딜 정책은 애초부터 반발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준비되지 않은 정책이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왜 연기금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국민적 설득이 부족했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상을 제시하는 데에 소홀했다는 점도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는 처음부터 정부가 반발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연기금 활용에 대한 반발과 그에 따른 대응책 ▲연금개혁과 연계된 연금 독립성 강화 방안 ▲연기금 투자처의 필요성과 SOC 투입 연기금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등이 애초부터 발표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부실 정책'이 내부조율도 거치지 못한 채 성급히 튀어나온 원인은 정권과 관료·국책연구소와의 단절에 있다고 분석했다. 유 교수에 의하면 그동안 주요 정책의 반발 가능성과 대응책, 그리고 주요 후속방안 등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관료와 국책연구소가 담당해 왔는데 최근 들어서는 이같은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관료·국책연구소 주요정책 실증분석 마비...심증만으로 정책 추진할 꼴"
유 교수는 "KDI 등 국책연구소가 생산한 보고서 목록을 보면 이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제목을 지닌 보고서는 거의 없다"는 근거를 대면서 "관료와 국책연구소가 해야 할 역할을 안 해주고 있기 때문에 경제정책조차도 이데올로기나 심증, 입장에 따라서 취사선택이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기금 투입에 따른 투자 견인효과, 주요 사업에 대한 수익률 분석 등이 관료나 국책연구소에 의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심증과 계획서만으로 정책을 추진하려다 보니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됐다는 것이다. 연기금을 활용하겠다는 말만 있을 뿐 연기금 투입이 경기부양에 어떤 효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은 제시되지 않고 있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정부가 '꼼수정책'을 펴려 했기 때문에 한국형 뉴딜정책이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정부 재정의 직접투입이라는 정공법은 놔둔 채 현상적 재정적자를 줄여보겠다는 의도로 연기금을 무리하게 동원하려 한 것에 치명적 결점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전성인 교수 "재정적자 피하려 연기금 동원한 꼼수정책이 문제"
"경기부양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고 밝힌 전 교수는 "그러나 연금이 직접 사업 주체가 돼 뛰어라고 요구함과 동시에 수익도 보전해 주겠다는 재경부의 사고는 나쁘게 생각하면 정부 재정적자의 규모를 줄여 보려는 꼼수에 가깝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민자나 연기금이 SOC 사업에 투자한 뒤, 정부가 이에 대한 임대료를 지불하는 방식 즉 BTL 방식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재정 절감 효과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정부 스스로 비효율적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정부의 BTL 방식을 주택구입에 빗대며 "임대주택 들어가서 임대료는 내는 것이, 한번에 사는 것보다 현재가치로 계산하면 비용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면서 "다달이 월세를 낸다고 부담이 줄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경기부양 나서되 당당히 국채발행해 야당 설득시켜야"
또한 전 교수는 경제부처가 5% 성장 집착증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지금 정부는 내년에 무조건 5% 성장률을 달성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황을 받아들이 수 없다는 말"이라며 "경제정책을 아무리 극단적으로 편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5% 성장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전성인 교수는 "경기부양을 하려면 당당하게 국채를 발행해서 하고 야당과의 대화와 설득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서 하라"고 조언했다.
경제침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여당의 정책순위가 애초부터 뒤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이선근 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라인이 경기부양책을 건설쪽에 맞춘 것부터가 어퍼컷을 맞기에 충분했다"며 소비회복정책부터 먼저 꺼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애초부터 정당성을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문제제기 해 놓고 지금와서 보완해 가는 모습으로 해서는 도저히 커버를 못 해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선근 본부장 "신불자·임대료 등 민생문제 해결뒤 생산부문 진작 나서야"
이 본부장은 한국형 뉴딜정책의 전반적인 궤도수정을 주문했다. 내수부진부터 해결한 뒤 생산분야 진작책을 쓰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신불자 대책이나 임대료 과다 인상 등 민생문제를 해결한 뒤에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절차로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금 문제도 마찬가지. 정부가 연기금을 투입했다가 재정으로 우발 채무를 막겠다는 구상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복지시설 투자 등 연기금의 목적에 맞는 연기금 운영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본부장은 특히 경기침체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기업도시 대신 중소기업 R&D 클러스터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현재 비어있는 공단에 싼 가격으로 중소기업을 유치한 뒤 지방재정과 국가재정들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