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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한때 지난 2000년 9월 테헤란밸리 벤처타운 야경.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화려했던 지난달'과 달리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화려했던 한때 지난 2000년 9월 테헤란밸리 벤처타운 야경.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화려했던 지난달'과 달리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직원 5명으로 시작, 2년여에 걸친 연구개발 끝에 신기술 개발에 성공한 벤처기업 A사. 그러나 A사는 안입고 안먹으며 각고의 노력끝에 자체개발한 기술을 결국 한 대기업에 헌납하고 말았다. 납품을 의뢰한 대기업이 그 조건으로 신기술의 원가자료, 설계도면 등 제품에 관한 모든 정보를 통째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A사의 최고경영자(CEO)인 김석중(가명)씨는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 길 외에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없이 대기업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A사는 결국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데 성공했고 사업은 본궤도에 오른 듯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밋빛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기업 쪽에서 제품의 납품가를 좀더 낮춰줄 것을 요구해 온 것이다. 대기업이 요구하는 수준의 납품가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던 A사는 조금이라도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대기업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합리적인 수준에서 합의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A사에게 뜻밖의 일이 있어났다.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협상이 시간을 끌자, 그 대기업은 A사의 기술자료를 경쟁사인 B사에 넘겨버렸다. A사는 하루 아침에 자기기술을 놓고 경쟁사와 가격 경쟁을 벌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가자료와 설계 도면을 요구하는 대기업

문제는 이런 사례가 대기업에 납품을 해본 중소벤처기업들 사이에서는 생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시 벤처기업인 초고속인터넷 장비업체 C사는 납품 거래 관계에서 있던 한 대기업이 기술 원가내역서를 요구한 뒤 제품 원가에 관리비에도 못미치는 쥐꼬리만한 이문을 붙여 이를 납품가격으로 요구받기도 했다. 기술 자료를 가져간 것은 물론이다. 이쯤 되면 대기업과의 거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리베이트를 상납하거나 접대를 하는 일은 불공정 거래 사례에 끼지도 못한다.

대기업들도 할말은 있다. 납품업체에 원가자료나 기술 설계 도면을 요구하는 것은 납품업체가 도산하거나 제품 공급이 불가능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납품업체에 문제가 생겨도 대기업의 사업이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게 대기업들이 내세우는 이유다.

그러나 벤처기업들의 생각은 다르다. 대기업들이 정당한 기술에 대해서 제 값을 쳐주고 부당한 거래 관행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에 납품까지 하는 업체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벤처업체들은 대기업이 기업의 기밀에 해당되는 신기술 제품의 원가자료 및 설계도면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 보고 있다. 벤처기업이 힘들게 개발한 기술을 도용하거나 타 경쟁 업체를 육성해 벤처업체끼리 저가 가격 경쟁을 벌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벤처기업으로서는 생명과도 같은 신기술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기업 CEO 이인수(가명)씨는 "CDMA기술을 개발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미국의 벤처기업 '퀄컴'이 한국에서 사업을 했더라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며 "벤처들이 대기업의 하도급업체 취급을 받으며 사업기반까지 착취당하는 상황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벤처는 꿈에 불과하다"고 한탄했다.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또다른 벤처기업 CEO 박종연(가명)씨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해동안 땀흘려 농사를 지어 결실을 맺을 때가 오는가 하면, 지주에게 땅까지 빼앗겨버리는 소작농이 바로 국내 벤처업체들"이라며 "국내 벤처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소작농'을 보호할 장치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국내 벤처업체들은 '소작농', 보호 장치 절실

지난 8일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과 벤처기업대표들이 명동 은행회관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난 8일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과 벤처기업대표들이 명동 은행회관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최영수
글로벌 스탠다드에 어긋나는 대기업과 중소벤처간 불공정거래 관행은 국내 벤처의 고사에서 그치지 않고 고스란이 국가 전체의 산업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LCD, PDP, 휴대폰 등의 분야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세계적인 위치를 다져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중소벤처기업의 영역인 부품 소재 분야에서는 경쟁국들과 비교해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게 현실이다.

일례로 카메라폰의 핵심 부품인 카메라 모듈의 경우 일본 기업은 이미 500만 화소대에까지 기술력이 올라있지만 국내 업체들은 아직 200~300만 화소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핵심 부품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첨단 제품을 수출해도 남는게 별로 없다. 올들어 대 일본 무역적자는 이미 2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중 부품 소재 분야가 자치하는 비중이 77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기업과 중소벤처의 관계가 나아가야할 결론은 분명하다. 불평등한 거래 관계를 청산하고 '상생의 사업 파트너'로 거듭나야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귀가 아플 정도다.

벤처업계는 대기업과 벤처가 완전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부러워하고 있다. 중소벤처들이 대기업과 거래를 하기위해서는 까다로운 품질 테스트에 통과해야 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바늘구멍을 통과한 업체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자금은 물론 기술개발 지원 등 말 그대로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투명하고 합리적인 거래 관계가 일본의 중소벤처업체들의 부품 기술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결정적인 밑받침이 됐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대기업과 거래를 하고 있는 벤처기업인 최선호(가명)씨는 "국내에서만 사업하다가 일본 쪽과 거래를 해보니까 일본 대기업들은 국내 기업들과 비교하면 '봉'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며 "그런데 사실 협력관계에 있는 벤처의 기술력과 경쟁력이 대기업의 경쟁력임을 감안하면 그게 맞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일본의 사례에서 볼 때 국내 대기업들도 향후 과도한 외산 부품 의존도로 인한 경쟁력 저하 우려를 해소하려면 국내의 기술력 있는 벤처와의 협력사업 확대는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500만화소 카메라폰을 출시할 때 협력업체인 일본의 렌즈전문 회사 아사히 펜탁스와 공동으로 핵심부품인 카메라 모듈을 개발한 것은 국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상생의 파트너십 구현? 이제 귀가 아프다

정부도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이달 15일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협력사업을 추진하면서 대기업이 사업추진 자금의 50%를 중소기업에 지원할 경우 나머지 50%는 정부가 저리에 지원하기로 하는 등 협력사업 강화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내년을 벤처 재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의지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벤처 업계는 정부의 정책에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공동 연구개발 등 협력 사업에 앞서 고질적인 문제인 불공정거래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어떤 정책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대기업이 벤처업체에게 납품 조건으로 기술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직위를 남용한 성희롱이나 성추행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성희롱은 '범죄'로 취급받지만 불공정 거래는 '관행'이라고 불린다. 아무리 사회적 비난 여론이 일어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실 10년전만 해도 성희롱이나 성매매가 범죄라는 인식이 없었지만 지금은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으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이처럼 국내 산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져야한다. 불공정 거래가 관행이 아니라 범죄라는 인식이 생기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국내에서 관련분야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한 벤처기업인의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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