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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사우(文房四友)란 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가는 용구로 종이, 먹, 붓, 벼루 4가지를 일컫는 말로 문방사보, 문방사완, 문방사후라고도 한다. 이중 벼루는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기 위한 동양의 고유한 필사(筆寫)도구로, 벼룻돌[硯石] 재료를 가공하여 벼루를 만드는 장인(匠人)을 벼루장이라 한다.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인 벼루는 대체로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벼루장이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물어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실학자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硯經齋全集) 쌍이연명에 보면, 국수(國手)가 신경록(申敬祿)에게 부탁하여 위원자석(渭原紫石)으로 뿔 없는 용 2마리를 새긴 벼루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89년 12월 중요 무형문화재가 처음 지정될 때 그 기능보유자로 서울의 이창호(중요무형문화재 제94호)씨가 선정된 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쌀과 도자기 그리고 온천 그리고 복숭아의 고장이자 문화예술의 관광의 도시 이천에 서예가들로부터 많은 애찬과 사랑을 받으며 일본시장으로 벼루를 수출까지 하는 등, 3대째 벼루와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벼루장이 있어 찾아 가 보았다.
이천 시내에서 곤지암·신둔방향으로 이천정보고등학교를 지나 첫 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700여m 정도 들어가면 사음동 54-1번지, 저수지 바로 옆 단층 주택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신근식(63세, 영춘공예사 대표) 벼루장이 살고 있다.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에서 공장 및 전시장을 운영하면서 장인정신의 맥을 이어오던 신씨가 이천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공장과 전시관 부지를 물색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난해 설봉공원에서 60일간 개최된 2003 세계도자비엔날레 행사장의 무형문화재 전시관에 작품을 전시·판매하면서 공장과 당시 이천시청 지역경제과 도예팀의 송광석씨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천은 쌀과 복숭아, 산수유와 함께 도공의 혼이 깃든 도예의 도시이자, 각종 유물과 유적이 산재돼 있는 문화·관광의 도시”라는 송광석씨의 말을 듣고, 지난 11월20일 공장과 전시관을 이천으로 이전했다.
신씨는 1942년 1월11일, 벼룻돌 생산지이자 전통적인 벼루의 본 고장인 충남 보령시 금라면에서 태어나 조부와 선친의 뒤를 이어 3대째 벼루를 제작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조부와 선친이 벼루 제작에 정성과 혼을 쏟으며, 땀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던 중 16세 때부터 최고의 벼루장이 되기 위한 항해를 시작했다.
조부와 선친이 평소 벼룻돌을 다듬고 조각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지켜 본 탓인지 남달리 조각에 재능을 보였던 신씨는, 벼루 만드는 일을 시작한지 20일 만에 작지만 첫 작품을 완성했다.
신씨는 “어릴 땐 할아버지, 아버지가 왜 돌을 깎아 낼까, 궁금했고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벼룻돌을 깎아 내고 조각하는 일이 쉽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벼루장이 되기 위한 항해를 시작하고 보니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첫 작품이 완성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적이고 기뻤다”며 당시를 회고 했다.
이후 벼루장이가 되기 위한 쉼 없는 연구와 작업을 계속하던 중 1962년 멕시코박람회에 불상을 출품하게 된 것이 관광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신씨의 본격적인 벼루 인생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1963년 5월 충북 단양에 영춘공예사를 설립한 신씨는 “좋은 원석 뒤에는 반듯이 좋은 작품과 훌륭한 대가가 나온다”는 진리로,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 좋은 원석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산삼을 캐기 위한 심마니처럼, 전국의 험준한 산을 넘고 또 넘었다.
좋은 벼루 만들기에 온갖 정성과 혼을 쏟기 시작한 신씨는 1976년 9월 제6회 전국관광민예공 경진대회 장려상과 1983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 기관장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 10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영춘공예사가 공예품전문 생산업체(제85-1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1991년 제21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 참가해 장려상을 차지한 신씨는 그 해 12월 경기도로부터 우수기능인(제91-14호) 지정을 받았으며 1996년에는 성남시 공예사업협동조합 제5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신씨는 1997년 제27회 전국 공예품경진대회에 참가해 한국관광협회장상을 수상하면서 1998년 9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이로 지정되었다.
“돌의 모양에 따라 작품이 구상되기에 좋은 원석을 만날 때면 기쁘다”는 신씨는 “무엇보다 좋은 벼루는 먹이 잘 갈려야 하고, 맑고 광택이 흐르며 먹향이 감도는 질 좋은 먹물을 얻을 수 있어야 하며, 갈아놓은 먹물이 벼루에 전혀 잦아들지 않아야 하고, 돌결이 곱고 부드러워 붓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좋은 원석은 채석하기 위해서는 1m50cm정도의 암·폐석을 제거해야 좋은 원석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신씨는 현재 충북 단양과 강원도 정선 2곳에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 영춘공예사에 근무했던 5~6명의 직원이 강원도 횡성과 충남 대천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나 후계자로 낙점된 제자가 없어 고심하고 있다. ”벼루장을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면 모든 기술을 전수하여 대를 잇도록 하고 싶다”고 밝혔다.
현재 신씨가 제작·보유하고 있는 작품 중 대작은 충북에 있는 단양광산에서 채석한 원석으로 4년 만에 탄생시킨 십장생 벼루다. 가로 116cm, 세로 67cm로 국내 최대 작품으로 송학, 십장생, 십이지 등 동물 90여 마리와 사군자 등이 새겨져 있다.
한편 신씨는 도공의 혼이 숨 쉬는 문화예술의 고장답게 “앞으로 공장과 전시관을 건립하여 후계자를 양성하는 것은 물론, 전수회관과 박물관을 건립하여 현대생활에서 점점 잊혀가는 벼루를 보존하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평소 벼루에 관심이 있거나 작품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011-9061-3243번으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