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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에 잎사귀 까진 배추 잎
가뭄에 잎사귀 까진 배추 잎 ⓒ 김도수
추수하는 가을철이면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날이 계속되어야 가을걷이가 빨리 끝난다. 그런데 올 가을은 유난히 비가 내리지 않아 추수가 빨리 끝나 다행이지만 대신 배추와 무가 가뭄에 잎들이 축 처져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가뭄이 심하면 배추는 속이 차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달지도 않고 질겨서 배추 품질이 몹시 떨어진다.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둘째치고 가뭄이라 배추 잎이 처져 있어 수확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 하루빨리 비가 내려야 할 텐데 걱정이다.

주말 오후, 고향 집에 도착하자마자 배추밭을 둘러보고 있으니 지나가는 마을 형님이 비가 내리지 않아 올 배추농사 잘 되기는 진즉 틀렸다고 애타는 마음을 전한다.

“올 가을, 날이 하도 가물아 붕게 집집마다 배추 잎이 다 까져불어. 비가 좀 내려야 헐턴디 큰일이고만. 어쩌서 비가 올라고 잔뜩 흐리다가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말짱허게 도로 개붕가 모르겄어. 모다덜 배추 잎 다 까져부러서 참말로 큰일이고만∙∙∙."

비가 내리지 않아 고향 마을 사람들은 경운기를 동원해 물을 품어 배추밭에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배추는 물 한 방울 적시지 못해 배추 잎들이 축 처져 있어 바라보기가 안타까울 정도다. 뒤 둑은 그래도 조금 덜 한편인데 앞 둑은 모래 땅이라 그런지 더욱 처져 있다.

물을 담아 날린 리어카
물을 담아 날린 리어카 ⓒ 김도수
리어카를 끌고 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 냇가로 갔다. 리어카에 물을 담아 배추밭에 뿌려주기 위해서다. 리어카에 담아온 물을 배추 밭에 뿌리고 있으니 지나가는 큰 집 형님이 한 마디 한다.

“먼지 날리는 밭에 고로케 쬐께씩 뿌려주면 배추 잎이 다시 살아나겄냐. 이슬 내린 것 맹키로 쬐께씩 뿌려 주면 더 목만 탄게 한 포기를 주어도 몽땅씩 줘부러라.”

리어카에 물을 담아 경사진 강변 언덕 길을 오르며 먼지만 폴폴 날리는 퍽퍽한 배추 밭에 물을 뿌려준다. 그러나 몇 수대 퍼 주면 리어카에 물은 다 떨어지고 가을 하루 해는 빨리 저물고 만다.

우리 배추밭 옆에 배추 20여 포기를 심은 영애네 엄마는 회관 옆쪽에 설치된 상수도 물을 받아서 물 뿌리개로 물을 준다. 영애네 엄마는 끙끙거리며 내가 리어카로 경사진 강변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물을 주자 “눈 찔끔 감아불고 회관에 호스 꽂아서 줘불어” 한다.

“아이고메, 마을 사람들에게 얼매나 혼나불라고 그 물을 준다요. ‘앞으로 몇 일만 가물면 밥 해먹을 물도 모자라고 김장 헐라먼 물 때문에 큰일 나게 생겼다’며 지금부터 걱정을 했싼는디 내가 회관에 있는 상수도 꼭지에 호스를 꽂았다 허면 아마 난리가 나불 것이요.”

날이 저물어 집에 들어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리어카에 물을 길어다 배추밭에 골고루 뿌려준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먼지만 폴폴 날리는 배추 밭을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만은 없지 않는가. 그래, 그냥 눈 찔끔 감고 상수도 물을 뿌려주자. 마을이 생긴 이래 아직까지 밥 해먹을 물이 부족해서 밥을 굶은 적도 없었고 아직까지는 밥 해먹을 물은 충분히 나오니 또 이장 말에 의하면 상수도 저장탱크에 물이 비축되어 흐르고 있다니 눈 딱 감고 밤중에 물을 주기로 작정하고 물 호스를 찾아 놓았다.

‘그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물이 없어서 밥 못해 먹은 적은 없었제. 아무리 가물아도 샴에 물은 쬐께씩이라도 나온게 샴에서 물 질어다 밥해 묵으면 되제 뭐. 샴에 물 안 나오면 섬진강 물로 밥 해먹으면 됭게. 에라이 모르겠다. 밤중에 걍 줘불자.’

앞 산에 둥근 달은 뜨고
앞 산에 둥근 달은 뜨고 ⓒ 김도수
가을 내내 추수하느라 피곤했던지 마을 사람들은 일찍 주무시고 마을은 적막하기만 하다. 보름인지 앞 산에 둥근 달이 훤하게 떠있고 우리 집 들어오는 고샅 길 가로등 불빛이 회관 앞 마당과 우리 배추 밭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먼저 회관과 배추밭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 스위치를 내렸다. 아내는 회관 보일러실 옆에 있는 상수도 꼭지에 물 호스를 꽂고 나는 배추 밭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아내는 사람들이 나타나는지 사방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회관 앞마당 쪽에 나와 망을 보기도 하고 혹시 상수도 꼭지에 꽂아둔 물 호스가 빠지는지 확인하며 왔다 갔다 바쁘다.

상수도 물로 배추밭에 물을 주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는 날이면 큰일 이었다. ‘도수가 먹을 물도 모자라는디 어젯밤에 배추 밭에 물을 주었다네’ 소문이 날 거고 비가 내려 해갈이 될 때까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으며 미움을 사게 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는지 망을 보고 있던 아내에게 사람이 나타나면 재빨리 상수도 꼭지를 잠그고 길가에 가로 질러진 물 호스를 걷으며 내게 신호를 보내라고 몇 번씩 당부를 한다. 망을 보는 아내를 믿으며 배추밭에 물을 주는데 혹시 사람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몹시 두렵기만 하다.

아내도 나처럼 가슴 졸이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몇 번씩 배추밭으로 다가와 “아직도 더 줘야혀? 아, 빨리빨리 얼릉 뿌려부러. 불안해 죽겄고만. 근디 얼마나 남았어?” 아내는 자꾸만 배추밭으로 달려와 빨리 뿌려버리라고 작은 목소리로 재촉을 해댄다.

빨리 뿌려버리라고 내게 재촉을 하며 돌아간 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아 아내는 또다시 달려와 소리친다.

“아직도 멀었어.”
“아직 절반도 안 줬어. 사람이 오는지 얼릉가서 망이나 잘 봐. 들키는 날엔 우리 망신 사붕게.”
“긍게, 얼릉얼릉 줘 불어. 나도 사람이 나타났껨시 불안해 죽겄고만∙∙∙.”
“야, 호스 빠져부렀다. 빨리 가서 낑겨.”

상수도 꼭지에 꽂아둔 물 호스가 빠져버려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며 들리는 소리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무 잎사귀를 쳐주는 아내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무 잎사귀를 쳐주는 아내 ⓒ 김도수
배추 포기 사이에 있던 물 호스를 잡아당기며 물을 주니 호스가 자꾸만 꼬여 물 압력에 의해 상수도 꼭지에서 자주 빠진다. 그 때마다 아내는 재빨리 상수도 꼭지를 잠그고 다시 물 호스를 꽂으며 호스가 안 빠지도록 손으로 꽉 붙잡고 있다.

오늘 밤, 초등학교 6학년 딸내미가 고향 집에 왔더라면 배추 밭 중간에 서서 물 호스를 늘여줬다 풀어줬다 잡아주면 호스가 꼬이지 않아 물을 빨리 줄 수 있을 텐데 '한자 능력검정시험' 준비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물 호스가 짧아 목타는 배추와 무에 물을 제대로 줄 수가 없다. 물 맛을 골고루 볼 수 있도록 호스를 높이 쳐들고 끄트머리를 눌러 물이 멀리 나가도록 흩뿌려 준다. 먼지만 날리는 배추밭에 비가 내리기만을 고대하며 서 있는 배추들이 꼭 내 자식이 목타는 것처럼 안타까웠는데 물을 뿌려대니 마음이 흡족하기만 하다. 씨를 뿌려 키우는 농작물들은 자식이나 마찬가지 다는 농군의 마음, 달빛 환한 가을 밤에 실감을 하고 있다.

호스 끄트머리를 눌러 물이 멀리 퍼져 나가도록 흩뿌려 주니 배추 잎사귀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배추밭 바로 옆에 사는 점순이네 부모님께서 ‘밖에 비가 온다냐’며 혹시 깰까봐 몹시 불안하기만 하다.

먼지만날리는 배추밭에 물을 정신 없이 주고 있는데 갑자기 회관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아이고메, 큰 일 나부렀네. 기어이 들켜 버렸고만. 인자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욕깨나 얻어먹게 생겼네. 이를 어쩐다제.”

나는 몸을 재빨리 낮추고 물 호스를 배추밭에 깔며 물 소리가 들리지 않게 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을 미리 발견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발견한 아내는 재빨리 상수도 꼭지는 잠궜지만 길가에 가로질러진 물 호스를 걷을 사이도 없이 마을 아줌마가 바로 코 앞에 다가와버린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다는 듯 태연하게 물 호스를 걷고 있던 아내에게 “배추 밭에 물주요?”하고 묻는다.

“예, 남들 눈치 때문에 밤에 주고 있고만이라우.”

다행히 아내 앞에 나타난 분은 낮에 회관 옆에 설치된 상수도 물로 배추밭에 물을 주라고 하던 영애네 엄마였다. 휴, 다행이다. 불안하던 마음이 순간 놓이며 평온해 진다. 아내는 상수도 물을 배추밭에 주었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절대 말 하지 말라고 영애네 엄마께 신신부탁을 한다.

아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영애네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나는 밭 언덕에 올라 서서 다시 한번 부탁을 한다.

“영애네 엄마, 넘덜한테 절대로 이야기 허지 맛쇼.”

내가 한 말을 혹시 못 알아들었을까 봐 아내는 영애네 엄마 곁으로 뛰어가더니 “절대로 마을사람들께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러네요.” 또다시 부탁을 한다.

“내가 뭐더로 말헌다요.”

징검다리를 건너며 밭에 가시는 점순이네 아버지
징검다리를 건너며 밭에 가시는 점순이네 아버지 ⓒ 김도수
새벽녘이다. 눈 뜨자마자 물 안개 피어 오르는 섬진강으로 달려가 리어카에 물을 담아 실어 날린다. 나는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끙끙거리며 경사진 강 언덕을 올라서며 배추밭에 물을 주고 있다.

어제 저녁, 배추밭에 물을 뿌려줘 배추와 무 잎사귀마다 물기가 서려 있고 먼지만 폴폴 날리던 배추밭 고랑 사이에 물기가 군데군데 배어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혹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새벽부터 물을 실어 날리며 뿌려주고 있는 것이다.

아침 일찍 회관 앞에 나와 우리 배추밭을 바라보던 큰 집 형님이 “음마, 배추가 다시 살아나부렀네. 조금씩 뿌려줘라도 물기가 있어서 그런지 잎이 근방 살아나 분다 잉. 근디 배추가 여기저기 몇 포기씩 뽑혀있다. 니가 가지고 갈라고 뽑아놨냐?”
“예.”

상수도 물을 뿌려줘 마음이 켕겨 형님 묻는 말에 얼른 “예” 하고 대답을 해 놓고 보니 어젯밤 물을 주며 배추포기 사이에 있던 물 호스를 강제로 끌어 잡아당기다 보니 배추 몇 포기가 뽑혀 있었던 것이다. 형님은 어젯밤 상수도 물을 뿌려준 사실을 전혀 모르고 배추 잎들이 다시 살아나 있으니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다.

포기마다 물을 흠뻑 뿌려주고 싶었지만 언제 비가 내릴지 몰라 물을 흩뿌려줬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다시 고랑마다 먼지가 일며 배추 잎은 축 처져 까져버릴 것이다.

그나저나 어서 비가 내려 “어찌까, 날 가물아 배추 잎 다 까져부네” 하는 마을 사람들 한숨이 소리가 안 들린 텐데 걱정이다.

물 안개 핀 진뫼마을의 새벽
물 안개 핀 진뫼마을의 새벽 ⓒ 김도수


※ 글 뒤 이야기: 다행히 물 뿌린 2일 후, 단비가 10mm정도 내리고 일주일 후에는 또다시 100mm정도 내려 고향마을에 물 부족 현상은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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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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