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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기자의 반론의 글을 읽으면서 가벼운 흥분과 전율이 스쳐가는 이유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첫째, 현 교육의 실태와 흐름에 대하여 더불어 고민하는 동지자적인 마음이 들어 반가움이 앞섰고 이런 식의 건전한 토론은 얼마나 건강한 것이랴 가슴 뿌듯함이 있었다.

둘째, 어차피 글이란 쓴 사람의 손을 떠나면 그 사람이 의도하는 방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읽는 이들의 철학과 배경지식과 자유의지에 맡겨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몇 가지 면에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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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한국 교육을 어쩔 것인가?

나의 글이 과연 이분법내지는 흑백논리의 바탕위에 씌어진 글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 된 일이다. 나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분리해서 '어느 교육이 더 중요하다,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의 장이 지식적인 면은 뒷전으로 밀어 두고 인성교육, 질서교육을 최우선으로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나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20년 이상을 교육의 한복판에서 살아온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한 자의 참회록처럼 고백하듯이 쓴 글이다. 무엇 때문인가? 어려워도, 말하기 싫어도 우리는 생각을 나누어야한다. 나누어가는 과정 속에서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에 대한 공통분모를 모색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씩 그쪽 방향으로 틀어가는 몸짓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탁상공론이고 교육의 이상주의를 부르짖는 것인가?

어느 누가 우리교육의 현주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 이선희 기자는 본인의 말처럼 정말로 이 나라의 교육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나? 본인의 말을 빌리면 학원 강사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런 반론의 글은 띄우지 말아야한다. 의미가 없다.

1. ‘수능 부정은 과연 충격적인 뉴스인가 1’에서 내가 언급하고 싶었던 핵심은 우리들의 사고의 기저에 흐르는 도덕관과 정직성의 부재, 작게는 학교사회에서 자잘하게 일어나는 학생들의 치팅(커닝)의 무감각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싶었다. 학부모, 학생, 교사, 법의 집행자, 가진 자, 갖지 않은 자, 배운 자, 못 배운 자, 교사, 학원 강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도덕관념에 대한 의식의 대 전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으로 설정 되어야 한다. 부정은 그 어떠한 이유 앞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쪽지 시험에서도, 간단한 과제물 제출에서도 부당한 방법으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고, 남의 것을 베끼는 행위는 부끄러움이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가 사고 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은 어떤가?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의 전당인 모 대학 교수가 세계적 저널지에 실린 논문이 종래는 남의 것을 표절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세계적 망신을 당했다는 기사를 접한 것도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대학 입학 예체능 실기평가에서 검은 돈 뒷거래가 오고간 뉴스도 잊혀진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과 한탕주의는 수능 부정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사건도 키워질 수 있는 온상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네 탓 내 탓의 문제로 돌려놓을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런 부도덕한 사회에 직간접으로 기여한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할 부채와도 같은 것이다.

2. ‘수능 부정은 과연 충격적인 뉴스인가 2’에서는 사고의 논리적 기틀을 마련하고, 예리한 문제의식을 형성해야할 중요한 고등학교 3년간의 기간에 오로지 우리 학생들은 수능 문제 한 문제를 더 맞히기 위한 오지 선다형 문제풀이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중학교 내내 전교 5등내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다는 딸아이의 친구가 자립형 사립고 2학년에 다니고 있다. 기숙학교라 주말에만 집을 다녀가는데 일주일 단위로 문제집 10만원어치 정도를 사갖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말을 아이의 아빠로부터 들었다. 그렇게 공부에 몰입하는 딸아이가 기특하면서도 수능문제 한 문제라도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거의 비슷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끊임없이 풀어대는 딸아이에 대한 연민을 토로했다.

입시제도의 모순과 대학 간의 서열화,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하면 먹고 사는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그는 덧붙였다. 이런 한탄 섞인 교육의 방향이 진실로 지성을 중시하는 교육의 모습이라고 이선희 기자는 생각하는가 묻고 싶다. 대입시 제도와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 교육의 현 실태와 모순점을 직시해보고 그런 모순에서 파생되어질 수 있는 수능 부정사건과 같은 부작용을 반성해 보자는 것이 내가 글을 쓴 목적이다

이선희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지성 교육과 인성교육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당연한 것이다. " 교사는 교육서비스를 잘 제공해야 하는 공급자(이선희 기자)" 이면서 동시에 교육의 주체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오지 선다형 문제 풀이 식 단편적 지식을 주입하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문제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조언자이며, 문제를 학생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찰자이며 상담자이어야 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는 딸아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한 가지 예를 들으려고 한다.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수능과 유사한 SATⅠ, SATⅡ시험이 있다. 5시간 이상 잠을 자면 본인이 희망하는 학교에 갈 수 없다는 말은 비단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는 말이 아니다.

대학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들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달프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인가보다. 미국에서도 대학입학전형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사이다. 대학 수험자를 두고 있는 보통의 미국가정에서 방학기간에 휴가를 떠난다든가, 파티를 연다든가 하는 것을 절제하는 부모들의 모습은 거의 우리나라의 부모들과 흡사하다.

그러나 학생들이 SAT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또는 명문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기위해서 고등학교 수업과정(미국의 대부분 지역의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이 4년)내내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반복해서 풀고 또 풀면서 보낸다는 말은 아직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11학년에서 6주의 기간 동안 미국역사(American History)과목에서 수업된 내용의 일부분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의 외교정책과 중동지역에 실시되었던 외교 정책을 고찰한 후 오늘날 9.11사태와 테러리즘의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 주 과제였다.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한 비평가의 글, 역사가의 글을 읽고 공식적인 데이터를 참고해서 자기의 논리를 토론수업에서 펼치는 것이 미국역사시간의 수업의 골자였다.

딸아이는 왜 미국이 많은 나라로부터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언급하고 싶었지만 미국 학생들과 선생님의 마음을 언짢게 할 수도 있는 예민한 주제라 토론(Debate)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선생님과 상의를 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다양한 생각과 시각의 차이점에서 오는 의견 자체가 너무 소중하며 많은 학생들은 너의 의견에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선생님이 딸아이에게 격려를 해 주었다고 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멕시칸의 아이를 이년 내내 매주 화요일에 가르치는 봉사활동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체육활동(테니스, cross country), 다양한 클럽활동, 하루가 멀다 하고 보는 퀴즈와 에세이 준비, 장편의 고전 문학작품을 읽고 분석 비평한 후 발표하기 등등 한국의 고등학교 학생들 못지않게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보내야만 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지만 공부하는 내용과 방법은 이다지도 다르다. SAT성적만이 학생들의 인생을 좌우하는 기준의 척도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교육의 방법일 수 있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상호간(peer group)에 의견을 나누고, 토의하고, 절충하는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풍요로운 지식을 얻고, 사회봉사활동과 클럽활동을 통해서 장차 사회생활에 필요로 하는 도덕성과 질서 의식을 뿌리 내리고, 중요한 가치관을 형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교육의 현 상황은 이러한 교육의 본질조차도 실현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와 교육의 현실은 대학전형시의 수능등급이 곧 대학의 서열 등급이 되고 또한 이 등급이 대학 4년의 학업과 연구의 성취도와는 상관없이 사회진출 이후 영원한 계급장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모든 관심은 수능위주의 교육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던 가을 어느 날 베란다에서 퉁명하게 던졌던 중학교 1학년짜리 둘째아이의 말이 지금도 시리게 가슴에 남아 있다. 중간고사 수학문제 한 문제를 실수해서 틀렸다는 아이에게 위로 차 한 말이 오히려 아들아이의 마음을 더 심난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엄마, 수학문제 하나가 인생을 결정하는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닌가요? 엄마!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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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육현장에서 일하고 있음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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