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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마당에 걸려 있는 시래기.
가정집 마당에 걸려 있는 시래기. ⓒ 안병기

우리 할머니는 시장할 땐 욕도 요기가 된다는 걸 깨우친 분인지도 모른다. 욕을 할 땐 고봉으로 수북하게 주셨다. 세상은 어디까지나 '폼생폼사'다. 배우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욕을 하는데도 소품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할머니의 소품은 부엌에서 쓰는 부지깽이였다. 불땔 때나 쓰는 부지깽이가 어느 새 용도변경 되어 상대를 압도하는 전투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설마하니 그 부지깽이로 사람을 팰 리야 없지만 상대는 짐짓 위협을 느낀 척 쏜살같이 도망간다. 굳이 그 순간 우리 할머니의 표정을 말한다면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기 직전 "다 이루었다"라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던 그 표정과 흡사하리라.

자기 논에 물대기 같지만 우리 할머니가 노상 욕을 퍼붓는 상종 못할 분은 아니셨다. 사람을 좋아하는 할아버지 탓에 집에는 손님이 끊일 날이 드물었다. 때론 물건을 머리에 이고 장사하러 다니는 상고도 자고 가고, 때로는 묘자리 봐주러 다니는 지관도 자고 가기도 했다. 할머니도 그런 사람들에겐 아무런 불평이나 낯을 찌푸리는 일이 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시곤 했다.

혹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좀도리쌀이라고 아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끼니를 지을 때마다 안치려던 쌀에서 한 줌을 덜어내어 살강 밑에 있는 항아리에다 부어 저축해 놓는다. 그렇게 모은 쌀은 어쩌다 귀한 손님이라도 오시면 흰쌀밥을 짓는 데 쓰이는 거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 또한 남 못지 않았다. 막걸리도 몰래 담가 놓으시고, 봄이면 진달래도 따다 두견주 담그셨다. 그 중에서도 된장 맛이 으뜸이었다. 아마도 그 맛은 내가 죽어 곽(槨) 속에 들어가도 잊을 수 없는 맛일 것이다. 경복궁 옆 사간동 쪽에 가면 무슨 궁중요리 전수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하는 식당에 가서 된장국 맛을 보기도 했지만 내 혀가 기억하고 있는 우리 할머니의 된장국 맛만은 못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할머니는 시래기를 마치 굴비 엮듯 엮어서 처마 밑에 걸어 놓으셨다. 그것으로 겨울 푸성귀가 부족한 겨울을 나는 밑천으로 삼으셨다. 겨울 한 철이면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시래기와 처마 끝에 걸린 고드름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고드름은 시래기에게 묻곤 했다.

"나, 지금 떨고 있니?"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단련된 시래기일수록 더 쫄깃쫄깃한 맛을 낸다. 바짝 마른 시래기를 할머니는 소다를 넣고 삶으셨다. 시래기를 좀더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짧고 가느다란 겨울 햇살이 텅 비어내 무색투명한 위장을 렌트겐 광선처럼 통과할 저녁 무렵이면 밥 먹으라고 나를 부르는 할머니의 소리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마을 공기에 잔잔한 균열을 낸다.

"할머니, 오늘도 시래기국이야?"
"음식 타박하는 놈 치고 잘 되는 놈 씨도 없단다. 어서 밥이나 처먹어라."

끼니마다 시래기국이었으며 내 일용할 양식이라곤 보리밥이 전부였다. 내가 아주 이젠 시래기국에 물렸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때는 슬그머니 메뉴를 바꾸신다.

"자아, 오늘은 시래기죽이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슬그머니 자신이 젊었던 시절에 무등산에 가서 칡뿌리 캐다가 칡죽으로 연명하던 일을 꺼내놓으시는 거다. 요약하자면 나는 그 시절 오로지 시래기국을 먹기 위해 태어난 인생이었다.

그런 내 인생을 구해준 건 박정희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던 1968년 12월 5일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함으로써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아, 그랬구나. 난 시래기국을 먹으려고 태어난 놈이 아니었구나. 내 인생에 대한 최초의 자각은 그렇게 왔다. 그 자각의 대가는 혹독했다. 담임 선생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지 못하면 집에 갈 수 없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머리 나쁜 나는 언제나 그걸 외고 집에 갈까 노심초사하며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그래도 내가 왜 태어났는가를 아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교실 안에 '감금'되다시피해서 <국민교육헌장>을 외면서 난 담임 선생이 저지른 무례를 너그러이 이해했다.

첫번째 박에서 쏟아져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배터지게 밥을 먹고 여유가 생긴 흥보는 슬근 슬근 두번째 박을 타게 되는데 그 속에서 온갖 비단이 쏟아져 나온다. 그 비단을 보더니 흥보가 마누리에게 슬쩍 눙친다.

"흑공단 갓에 흑공단 갓끈, 흑공단 망건에 흑공단 당줄, 흑공단 풍안에 흑공단 풍잠, 흑공단 두루매기, 흑공단 저고리, 흑공단 바지에 흑공단 허리띠, 흑공단 보신에 흑공단 댓님, 흑공단으로 부채를 만들면 어떻겠나, 내 맵시?"

시래기로 만들 수 있는 요리도 흥보가 비단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는 차림의 다양성에 버금간다. 시래기국, 시래기 죽, 시래기 사골국, 오모가리탕, 메기탕, 추어탕 등등 따위 따위.

이제야 나는 고백한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시래기였고, 나머지 2할은 할머니의 마음이었다고.

모든 세상의 어머니는 맨 나중에는 자식들에게 한 그릇의 음식으로 남는다.

"그래, 우리 어머니 칼국수는 일품이었지." '아아, 이런 날 우리 엄마가 붙여주는 부침개나 먹었으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음식으로 할머니를 추억하곤 한다.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면서 담벼락 사이로 시래기를 엮어 널어놓은 집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세월이 흘러 어린 시절은 지평선 너머 어딘가로 사라지고 시래기 걸린 풍경만 가슴에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인간이 평면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다면체의 존재이다. 앞쪽에서 바라볼 때의 형태와 뒤쪽에서 바라볼 때의 형태가 다르게 보인다. 프랑스의 소설가 미셀 투르니에는 이렇게 설파한다. "뒤쪽만이 진실이다"라고. 풍요로 넘나는 오늘 우리 시대의 뒤쪽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우리 시대의 진실을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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