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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이 바를 때 국회의원이 보낸 달력도 함께 발랐다.
문종이 바를 때 국회의원이 보낸 달력도 함께 발랐다. ⓒ 김규환

자전거 탄 우체부가 가져온 짐꾸러미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송단 쪽에서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신다. 타는 솜씨가 서툴기 그지없다. 오르막길이라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돌을 피해 오르니 엎어질까 두렵다.

그날따라 꽤 가방이 무거워보였다. 우리 마을에 내리고 갈 것과 방촌, 강례, 평지에 집집마다 두꺼운 달력을 4장씩 전달하려면 몇 부나 될까. 반절지 크기의 달력이 네 마을 합하여 750장은 충분히 돼보였다. 국회의원 한 명당 두 장인데 중선거제도가 시행되던 때라 화순, 곡성, 담양이 한 선거구로 묶여 있으니 2명에게서 한꺼번에 온 모양이다.

방촌은 방리 2구여서 우리 마을 양지 주막에 맡겨놓으면 되지만 돌길 신작로를 따라 또 두 마을을 올라야 하는 집배원은 팍팍한 걸음을 나섰다. 평소와는 달리 자전거 핸들 오른쪽에 연한 갈색 짐 꾸러미 가방을 걸기 힘들어 달력은 뒤칸에 고무줄로 칭칭 감았지만 나이든 우체부는 발판 밟을 힘이 나지 않는 건지 초겨울 건조한 바람 때문인지 뒤뚱뒤뚱 불안하다.

방마다 새 문종이 바르고 문풍지 붙이신 어머니

“엄마, 핵꾜 댕겨왔어라우. 어딨당가?”
“시방 오냐?”
“잉~.”
“선상님 말씀 잘 들어쟈?”
“하믄이라우. 선생님께서 국어공책에다가 오늘 똥글뱅이 다섯 개나 그려줬당께요.”
“참말로 지복산이네(옹골차고 대단하네)!. 글면 금번 달만 다섯 개냐? 어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겨드랑이 쪽으로 사선으로 내려 맨 책보자기를 풀어 어머니께 빨갛고 힘차게 다섯 개 그려진 쪽을 펴서 보였다. 뒷문을 바르다 잠시 멈춘 어머니는 내 공책을 자랑스럽게 쳐다보셨다.

“엄마 뭣 하요?”
“응, 다우다 발라. 문종이만 발라각고는 우풍이 심해서 못 쓰거든.”
“근디 왜 풀에다 담가요?”
“풀을 먹여야 쫙쫙 펴지면서 빳빳해져 바람이 덜 들어온단다.”

어머니는 세숫대야에 담긴 멀건 풀에 얇고 하얀 천을 담가서 주물럭주물럭, 꺼냈다가 다시 풀을 먹이셨다. 탈탈 털고 나서 창호지 위에 천을 대고 몽근 빗자루로 싹싹 쓸어내린다.

“잡아 주끄라우?”
“그려, 가상을 잘 맞춰봐라. 팽팽히 땅거(당겨).”
“됐는그라우?”
“째까만 더.”

천이 울지 않아야 한다. 어머니를 거들었다.

초가집에 살던 순박한 시절이 있었다. 불과 25~30년 전이다. 우리 마을은 지붕계량이 70년대 후반에 이뤄졌다. 사진은 순천낙안읍성
초가집에 살던 순박한 시절이 있었다. 불과 25~30년 전이다. 우리 마을은 지붕계량이 70년대 후반에 이뤄졌다. 사진은 순천낙안읍성 ⓒ 김규환

월동 준비는 끝이 없다.

초겨울 월동준비는 김장과 땔감마련, 겨우내 먹을 나물을 챙겨두고 소에겐 덕석을 씌우고 지붕에 이엉을 해마다 새로 해 입혀 단장을 한다. 집이 크면 클수록 청소할 일도 많고 손봐야할 구석도 많다. 문풍지 두 겹으로 바르고 연기가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황토를 바르고 쥐구멍을 틀어막는다.

우리 마을은 6. 25 때 3번이나 죄다 불에 타는 바람에 60년대 새로 지어 반반한 집이 많았다. 더구나 나중에 샀던 우리 집은 방 숫자가 많아 너덜너덜한 종이를 벗기고 나서 문살에 낀 때를 물로 다 닦아내려면 하루는 족히 허비해야 했다. 문 바르기도 일이었다.

대충 일이 마무리 되었다.

“엄마, 말래에 있는 문종이 좀 주실라요?”
“뭣땜시? 냉겨둬야 나중에 뚫어진 데 막을 것인디….”
“홍어연(가오리연) 한나 맹글라고라우.”
“글면 저 쪼각을 가져라.”
“예. 엄마 글고 아까침에 우체부가 이장님 댁에 달력 갖고던디.”
“후딱 댕겨오니라. 주막에 니기 아부지 있는가 보고.”
“알았어라우.”

고샅길을 쏜살같이 달렸다. 회관 근처에 사는 서너 집에서는 마을 방송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찌 알고 왔는지 벌써 타가고 있었다.

“이장님 안녕하신그라우?”
“왔냐? 가만 있어라…. 니기 집도 두 장씩 네 장이다.”
“울 집은 방도 다섯 개나 된디 한 장 더 주시면 안 되끄라우?”
“낼 아직에 와보그라.”

넉 장을 찢어지지 않게 둘둘 말아 집으로 왔다.

“엄마 달력!”
“애썼다. 근디 금년 꺼는 글자가 더 작네.”
“뭐가 잘못 나왔능가?”
“아녀. 얼굴만 씨잘데기 없이 큰께 숫제 숫자가 보여야 말이제.”
“설은 얼매나 남았을랑가?”
“달포 남았응께 양력으로 1월 중순께나 들었겄제.”

달력 나눠주던 국회의원이 있었다.

국회의원은 예나 지금이나 참 돈도 많다. 당시 화순, 담양, 곡성 6만 가구에 2장씩 돌리려면 그 값도 만만치 않았을 게다. 반절 크기에 뒷면은 매끄럽고 앞면은 빛이 났다. 의원나리 얼굴은 전체 1/3이나 되었고 정중앙에 자리 잡았다. 칼라로 찍었으니 그 돈을 어디서 났을까. 선거 때마다 고무신과 막걸리를 돌리고 뒷돈도 수월찮게 들어갔다.

여하 간에 여당 출신 공화당 문형태 예비역대장, 민정당 정래혁 국회의장, 광주시장 출신 구용상 의원과 야당 민한당에서 신민당을 거친 국회부의장 고재청 의원까지 중선거구제의 수혜자들은 2등만 되면 달력을 돌려 선심을 팍팍 썼다. 잊을라치면 연말에 또 다시 인사를 했다. 지역주민들이 일년 내내 눈에 박아 놓으니 4년 후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80년 어느 해인가 달력이 오지 않았다. 소선거구제로 바뀌기 전이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해마다 문종이 바르고 마지막 작업이 달력 붙이는 일이었다. 작년 재작년 저재작년 것이 붙어 있는 위에 덧붙이고 붙이기를 반복해 벽지보다 훨씬 볼록 올라온 달력 붙이는 자리는 문고리 근처 식경(飾鏡) 가까운 곳이었다.

그 뒤론 농사월력(農事月曆)을 농협에서 대신 나눠줬으나 달랑 한 장씩이었고 예전 그 맛과 느낌은 나지 않았다.

“엄마 지가 붙이끄라우?”
“그려라.”

방 빗자루에 풀을 적셔 뒤쪽에 쓱쓱 발랐다. 걸레로 쭉쭉 문질렀다. 한 장은 큰방에 나머지 한 장은 행랑채 골방에 붙였다. 보고 또 보고 동그라미 쳐서 생일 표시하고 제삿날 적어 놓아 패이고 패인 달력 한 장에 1년 가족생활이 녹아 있었다.

나는 선거가 있기 전에는 국회의원 눈동자에 까만 볼펜으로 밤탱이를 만들어 놓았다. 설에 형과 누이는 거래처에서 빳빳하고 질이 좋은 월별로 한 장씩 넘기는 달력을 가지고 왔다. 경제부흥기에 달력은 주고받는 선물이었고 흔해 빠졌다.

뒤안, 뒤뜰에서 어머니는 천에 풀을 먹여 붙였다.
뒤안, 뒤뜰에서 어머니는 천에 풀을 먹여 붙였다. ⓒ 김규환

달력도 세상 변화에 민감하다

세월이 흘러 달력도 많이 변하고 작아졌다. 이맘때만 되면 달력 만드는 청계천, 동대문이 번잡했을 터인데 이젠 그 부산한 모습 찾기 힘들고 주는 이 없으니 박아놓은 못만 외롭네. 의원님들 정치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달력이나 한 장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다방과 동네 맥주 집 달력엔 매끈한 아가씨가 반쯤 드러난 실오라기를 걸치고 요염한 자태를 뽐냈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절이나 점집에서 나눠준 하루 한 장씩 뜯어내는 작은 일력(日曆)은 신문지보다 화장지 대용품으로 최고로 각광받기도 했다.

문종이 바르던 날,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루 이틀은 왠지 서늘했지만 밖에서 맑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와 방안 공기가 참 깨끗해 막혔던 코가 뻥 뚫렸다. 귀향하면 꼭 한옥을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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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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