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걸 바라는 건 없습니다. 다만 처를 비롯한 가족들이 20년 넘게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명예가 회복돼 가족들에게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전두환 정권시절(1983년)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자신을 고문했던 기관인 보안사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던 김병진씨가 15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를 신청했다.
김병진씨가 이날 오전 종로구 수송동 위원회 사무실을 방문해 제출한 서류는 명예회복과 보상심위 신청서를 비롯해 보안사에서 겪었던 고문과 '강제노역', 15년간 고국을 방문조차 하지 못해야 했던 '인권유린의 실상' 등이 담긴 자료들이다.
이날 제출한 명예회복 신청서에 김병진씨는 민주화운동의 주요내용으로 "재일교포 간첩으로 조작된 뒤 보안사에 강제채용 되었으며, 그 뒤 일본으로 탈출해 보안사를 고발하는 수기 <보안사>를 발간해 군부독재정권의 죄상을 폭로했다"고 적었다. 아울러 상이자 보상심의 신청엔 보안사에서 당한 고문으로 겪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한편 위원회 측은 김병진씨의 명예회복 신청서 등 관련서류를 받긴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서류가 접수된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위원회의 활동 근거가 되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에 해외동포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규정도 없을뿐더러, 서류 접수도 지방자치단체(거주지)에서 하도록 돼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김병진씨에게 서류를 '넘겨받은' 위원회의 강명구씨는 "워낙 서류 접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처리할 사항"이라며, "오늘은 민원인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서류를 인수한 것으로 정당한 접수처에 전달하여 접수토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약칭 전민상련)의 김성길 운영위원은 "현행 법률엔 해외민주인사들에 대해 명예회복 등에 대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 뒤, "민주화보상법 시행령을 제대로 보완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 더 절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성길 운영위원은 또 "오늘 서류 접수를 계기로 해외민주인사들의 명예회복 촉진에도 힘쓰도록 하겠다"며 "해외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곧 추진모임이 발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록 명예회복 등을 신청한 서류가 공식 접수되진 않았으나, 김병진씨도 "해외민주인사들도 명예회복 신청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명예회복 등 심의를 요청한 이유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걸 바라는 건 없다. 다만 처를 비롯한 가족들이 20년 넘게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다. 명예가 회복돼 가족들에게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 현행 민주화보상법 체계상 진상규명 등 실체파악에 대한 조사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몰랐다. 가해자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는 줄 알았다. 난 불법 체포되어 감금과 고문을 당했다. 가해자들은 조사해야 고문 사실도 제대로 밝혀낼 거 아닌가. 그런 조사도 없이 어떻게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 <보안사>란 책을 펴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말 그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썼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또 보안사는 반드시 해체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책을 펴낸 뒤, 보안사에서 협박도 받았고,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 처분돼 15년간 고국 방문을 못했던 일도 있었는데, 현재의 심정은 어떤가?
"지난 번 귀국했을 때 의문사위에 간 적이 있는데, 책상에 내 책이 꽂혀 있더라. 또 조사관들한테 내 책이 보안사의 실체 이해와 조사활동에 도움이 됐다는 얘길 들었다. 영광이었다. 또 여러분들이 내 책이 나온 뒤 보안사가 함부로 간첩조작을 못하는 등 민주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도 들었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 | | 간첩조작 고문 실상 밝힌 책 <보안사> | | | 김병진씨가 “죽기를 각오하고 쓴” 민주화운동 관련 증거 | | | |
| | | ▲ 간첩 조작 고문수사 등 국가폭력을 폭로한 책 <보안사> 표지 | | 김병진 씨가 쓴 <보안사>(도서출판 소나무, 1988년 발행)는 간첩조작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책으로 유명하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죽기를 각오하고 쓴 책"이다.
제일교포 2세였던 그는 모국에 유학(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중이던 1983년 국군보안사령부(약칭 보안사, 현 국군기무사령부:약칭 기무사)로 연행돼 온갖 고문을 당했다. 간첩 협의가 있다는 거였다.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렸던 그는 보안사측의 강압으로 2년간 보안사 직원으로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1986년 부인과 함께 간신히 일본으로 '탈출'한 뒤, 간첩으로 조작되며 겪었던 고문과 보안사의 공작실태가 담긴 책 <보안사>를 1988년에 펴냈다.
전두환에 이어 보안사령관을 지냈던 노태우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이었기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출판사 사장이 공안당국의 수배를 받아 피해 다녔으며, 출판사에 있던 책 8천권이 압수됐다.
"조국의 분단에 신음하는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 책을 썼던 그 역시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국정부는 그가 군사기밀보호법을 위반했다며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지난 2000년 일본인 1500여명의 탄원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내 진 뒤, 14년 만에야 다시 모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 이민우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