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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임가의 발 위에 영일이 올려진 것 같은 정지 동작이 방 안에 펼쳐지며 짧고 극한 외마디 소리가 나왔다. 날던 힘을 잃은 채 주막 마당에 동댕이쳐진 영일은 이마를 땅에 박고 허연 게거품을 물은 채 끅끅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이 버둥거렸다.
다른 방에서 뛰어 나오며 사립문을 막아서는 매서운 눈매의 조그만 사내를 달리던 힘으로 걷어 내려던 영중은 영일의 신음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그 사이 뛰어 나온 사내들이 영중을 에워쌌다. 그 중 한 사내는 아직도 호흡을 힘들어하는 영일의 목덜미를 무릎으로 누르며 제압하고 있었다.
‘어째야 하나? 이 놈들 뽄새로 볼 때 예사로 굴러먹던 것들이 아니다. 영일과 함께라면 누구라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영일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땅바닥을 기고 있다. 어째야 하나?’
영중이 견제 자세를 풀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데 사내들이 아주 느린 동작으로 대형을 좁혀 왔다. 보름달이 휘황한지라 화톳불 하나 없이도 마당 전부가 훤해 다가서는 사내들의 면면을 읽을 정도였다.
사립문을 막아섰던 조그만 사내는 삽짝 앞에서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있었고 영일을 누르고 있던 사내도 그대로였다. 임가라는 작자는 팔짱을 낀 채 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문 입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 뒤에 낯빛이 희멀건한 젊은 녀석이 포목에 싸인 기다란 뭉치를 들고 있는 모습이 더 위협적이었다.
‘화승총…?’
그제서야 살펴보니 그들 넷을 제외하고 영중을 에워 싼 사내가 여섯, 병장기 하나 없이 모두가 맨손이었다. 이런 산자락 주막이면 마을도 멀고 인가가 없으니 방포가 아니라 총통이 발사되어도 누가 알성 싶질 않았다.
‘무슨 의미일까? 나를 살려 주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도망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화승총을 준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생포하되 사세부득하면 없애겠다는 것인가?’
홀몸이라면 어찌하든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는데 아우 영일이 저 지경이 되어있는 바에야 용쓸 재간이 없었다. 그저 재주를 피우다 영일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하는 수밖에….
그 때였다.
“퍽”
사립문을 막아섰던 조그만 사내가 뒤로부터 충격을 받고 목을 젖힌 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는 자 뒤로 덥썩부리 수염이 언뜻 보였다. 곽포교였다.
“김 포졸, 어서 내빼!”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며 날 듯 도약하는 곽 포교가 창포검을 빼어들며 소리쳤다. 창포검 특유의 가느다란 자태에 양날의 푸르름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칼을 빼어든 곽 포교의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느라 대열이 풀어진 틈에 영중도 몸을 날렸다. 자반 뒤집기를 하듯 두 번 도약해 영일을 누르고 있는 자를 향해 곧장 다가들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자반 뒤집기의 회전력을 이용해 오른발을 돌려차며 들어가니 영일을 누르던 자가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영일이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잽싸게 울타리를 등지고 뒤로 빠졌다. 그러더니 곧장 추스르며 방어자세를 잡았다.
곽 포교는 창포검으로 세 명을 견제하며 치고 들어가고 있었고 영중은 결국 영일을 누르고 있던 이를 호미걸이로 걸어 넘어뜨리고 인중에 정권을 먹여 넣었다.
일이 예기치 못 했던 상황으로 돌아가자 사내들은 장작을 꼬나들고 비수를 꺼내 들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직 영중과 영일, 곽 포교를 둘러싸고 있는 진영이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임가가 봉놋방에 있는 영중의 창포검을 집어들고 마당으로 내려섰고, 그 뒤의 젊은 사내가 긴 막대의 포목을 벗겼다. 화승총이라고 생각되면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 나는 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세자 반이 넘는 화승총보다는 한 자 반 가웃이나 짧은 총신에 양이의 것처럼 어깨판(개머리판)이 달려 있는 모양의 총이었다.
“이제 그만들 하지!”
임가의 소리에 곽 포교와 영중 형제가 돌아보았다가 총을 보고는 일순 경직되었다. 그러나 화약 점화를 위한 심지인 화승(火繩)에 타 들어가는 불꽃이 없는 것을 확인한 곽 포교는 당장 발사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칼을 고쳐 쥐고 열 발짝도 되지 않을 거리의 화승총을 향해 달려들어갔다.
〔탕〕
매케한 화약 내음과 하얀 연기가 곽 포교의 앞을 가렸다. 영중과 영일이 입을 벌린 채 움찔했다.
잠깐의 사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모두가 제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영중이 정신을 차려 사태를 파악하니 자신과 영일의 목에 비수가 다가 와 있었고 눈 앞엔 임가가 왼손으로는 젊은이의 총신을 들어올린 채 오른손의 칼로 곽 포교의 칼을 막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곽 포교의 칼등을 자신의 칼로 내리누르며 임가가 말했다.
“이제 항복하시게. 우린 자네들 목숨에 관심이 없네.”
곽 포교가 칼에 들어간 힘을 빼지 않은 채 임가를 한참 쏘아보며 물었다.
“죽이기 전에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오.”
“우린 자네들을 죽이지 않네.”
“그런 입발린 수작은 필요없소.”
“궁금한 게 뭔가?”
“당신들의 정체가 뭐요?”
“자네들이 죽지 않길 원하는 사람이지.”
곽 포교가 칼을 떨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당신들은 뉘시오. 대체 어인 무리관데 양이의 총포를 들고 도당을 지어 행악을 부리시오?”
화승이 아닌 부싯돌로 점화해 방포하는 서양인의 총기를 대동강 제너럴 셔먼호 사건 때 겪은 바 있기에 짚어 물었다.
“이 총포는 양이의 것이 아닐세. 여기 조선에서 나온 것이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대동세상을 위해서, 가난이 백성의 숨통을 조이지 않을 배부른 세상을 위해서, 외세에 휘둘리며 피 빨리지 않을 강한 조선을 위해서 만들어진 우리의 것일세. 우린 자네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네. 가렴주구를 일삼는 벼슬아치들의 개로 살아가지는 말게. 우린 자네들이 필요하네.”
“……”
“평양을 나선 이후로 우릴 추적하는 무리가 있다는 낌새를 챘네. 안주 근동에서 우릴 감시하는 눈길을 놓쳤는데, 그러고서는 본거지로 갈 수가 없었지. 얼마나 우릴 아는지도 궁금하고 이 곳에서 추적의 맥을 끊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정보를 흘릴 수밖에 없었지. 예상 외로 빠르더군. 자네들의 기찰망이 말이야. 생각보다 빨리 이곳으로 와 주었어. 허나 자네가 밖에 있는 줄은 몰랐네.”
“난 내 패와 같은 장소에 몰려 있진 않소. 냄새를 맡고 이 곳까지 왔는데 이미 저들 형제가 들어온 것 같더군. 해서 난 저기 산자락에서 멀찌감치 주막 전체를 내려다보며 노숙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더군. 의외로 나도 놀랐소이다. 어설픈 무리배 도당인 줄 알았다가 큰 코를 다쳤소.”
“우린 자네 같은 이들이 필요하네. 순순히 내 말을 듣게.”
“개수작!”
그 때였다. 모두가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편하게 말을 주고받던 곽 포교가 별안간 째차기로 임가의 턱주가리를 후렸다. 방심하고 있던 임가가 턱을 얻어맞고 넘어가면서도 사뿐 몸을 틀어 곽 포교의 왼쪽 귀밑을 가격했다. 귀신 같은 솜씨였다.
상대방과 거리를 두지 않고 예비동작 없이 선 자세에서도 허리를 제끼고 틀어 상대의 무릎과 배를 훑어 올라 눈 깜짝할 새에 상대의 턱을 노린 곽 포교의 솜씨나 맞고 넘어가면서까지 상대의 급소를 놓치지 않고 노린 임가나 대단한 무예였다.
급소를 맞고도 곽 포교는 무너지지 않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재빨리 싸리 울타리를 낙법으로 넘어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큰 길로 가지 않고 길 옆의 급경사 수풀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영중과 영일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자들을 제외한 사내들이 모두 뛰어 나갔다. 그러나 먼저 뛰어 나간 총 든 젊은이의 동작을 지켜보고는 모두들 제 자리에 멈춰섰다.
총든 젊은이가 재빨리 총의 노리쇠를 잡아 당겼다. 아까 발사했던 탄환의 종이 탄피가 뱉어지고 허리춤에서 탄두와 탄피가 결합된 탄환을 하나 꺼내 노리쇠에 얹은 후 밀어 닫았다. 천천히 총을 들어올려 가늠쇠에 곽 포교가 뛰어간 수풀을 얹었다. 저 만치 수풀을 지나 계곡으로 뛰고 있는 곽 포교의 등이 보였다.
아마도 곽 포교는 한 번 방포했으니 화약과 총환을 넣어 다져 재장전하는 시간이면 달아나는데 충분함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한 번 방포한 후 총통의 내부를 닦아내는 세총(洗銃)의 과정을 생략한다 해도 약통에서 화약을 쏟아 총구에 부어 넣고 나무 꽂을대인 삭장(槊杖)으로 다져 다시 납탄을 넣은 후에 화문에 점화약을 채워 발사하기까지의 과정이면 아마 이백 보는 족히 넘게 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경사진 아래로 뛰게 되면 조준할 때 총구가 아래를 지향하므로 장전한 납탄이 굴러 나올 테니 그걸 고정시키자면 하지(下紙)라 하여 삭장으로 종이를 밀어 넣는 절차를 더 해야 하니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총 든 젊은이의 재장전은 총환을 노리쇠에 올려 밀어 넣는 그 한 동작으로 어이 없게 끝났다.
덥썩부리 수염의 지나치게 영리한 판단력과 지나치게 빠른 달음박질이 결국 죽음을 부르게 된 것이라 생각하며 젊은이는 방아쇠에 검지손가락을 걸고 천천히 호흡을 조절했다. 침묵이 무겁게 밤 공기를 밀어내고 달빛은 말없이 휘황했다. 그 가운데 먼 만치서 곽 포교의 빠른 발딪는 소리만 타닥거린다.
오륙십 보.
총 잘 놓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처지이고, 아무리 보름달이 훤하다고는 하지만 월광(月光)에만 의지해 이 정도 거리에서 뛰는 물체를 맞추기란 무리라는 생각들을 하는지, 어떤 사내들은 발사도 하기 전에 뛰어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섣불리 뛰어 나가다 자기 등짝에 총환이 박힐 수도 있음을 깨달았는지 차마 뛰쳐나가지는 못 했다.
가늠쇠와 가늠자 위에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검은 그림자를 제대로 올려놓은 젊은이가 그러잖아도 흰 얼굴빛이 달빛에 더욱 희어진 모습으로 마지막 절차처럼 임가를 쳐다봤다.
마루에 쓰러지듯 걸터앉아 턱을 쓸고 있던 임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살려 보냈을 때 번질 파장보다도 아까운 재목을 수하에 넣지 못 한 게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타-앙〕
총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긴 메아리를 남기며 째지게 울었다.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총소리가 밤의 정적을 길게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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