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는 민족일보를 용공신문으로 날조한 무도한 그들로부터 무참히 법살 당한 조용수 열사님! 그 나이 서른 한 살, 아까운 나이가 더욱 애통합니다. 겨레 위한 고귀한 웅지가 채 피기도 전에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어언 43주년, 해를 거듭할수록 쌓인 조국통일의 기운이 이제 보안법 폐지를 내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19일 오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43주기 추도식'이 열린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 있는 조용수 묘소 앞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 투사들은 43년 전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사형 당했던 그날의 분노와 슬픔을 되새기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추도식 참가자들은 고인의 삶을 이어받아 국가보안법 폐지에 힘쓰고,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고 결의했다.
일본에서 추도식 참가를 위해 온 '민족일보연대포럼'의 윤정순씨와 박노선씨 등 재일교포와 일본인 야마모또 주오쇼씨도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 | "훈장 받은 사람 돈 받은 게 왜 죄입니까?" | | | [인터뷰] 11살 때 조용수와 한 집에 살았던 재일교포 윤정순씨 | | | |
| | | ▲ 재일교포 윤정순씨 | | "조용수 선생은 아이들한테 다정하고 부드러운 분이셨습니다. 당시에 성탄절을 앞두고 처음 만난 걸로 기억합니다. 조 선생께서 저한테 종이상자에 든 과자를 선물로 주신 적이 있습니다."
19일 오후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서 열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43주기 추도식'에 참가한 재일교포 윤정순(54)씨.
일본에서 추도식 참가를 위해 온 '민족일보연대포럼'의 동료들과 함께 묘역을 찾은 윤정순 씨는 "조용수 선생은 아무런 죄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용수 선생께 자금을 줬다고 했던 간첩 이영근이란 사람은 노태우 정권 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궁화 훈장을 받을 정도로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사람한테 자금을 받은 것이 어떻게 죄가 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지난 1990년 노태우 정권 때 이영근씨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사실을 적시하며, 조용수에 대한 혐의는 완전히 날조임을 지적한 것이다.
윤정순씨는 1959년 조용수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약칭 민단) 도치키현 부단장으로 있을 때 약 1년간 같은 집에서 살았다. 윤씨가 생전의 조용수 사장을 마지막 본 건 11살 때였는데, 이제 소년은 중년을 넘어 54살의 나이로 묘소 앞에 섰다. 43년만의 만남인 셈이다.
조용수 사장의 묘소 앞에서 서 감회에 젖어 있는 윤정순씨를 만났다.
- 조용수 사장과 함께 살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언제였나요?
"아버지가 민단 도치키현 사무부장으로 계셨습니다. 조용수 선생께서 도치키현 민단 부단장으로 오셨습니다. 저희 집이 이층이었는데 1층엔 우리 가족이, 2층에 조 선생이 살았습니다. 제가 11살 때였습니다."
- 당시 만남과 관련해 기억나는 게 있나요?
"조용수 선생은 아이들한테 다정하고 부드러운 분이셨습니다. 당시에 성탄절을 앞두고 처음 만난 걸로 기억합니다. 이맘때였습니다. 조 선생께서 저한테 종이상자에 든 과자를 선물로 주신 적이 있습니다."
-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어떤 인물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해하고 있는 조용수 선생은 한마디로 민족주의자입니다. 그 당시 군사정권이 받아들기엔 힘들 정도로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전 평소엔 부드러운 면만을 봤는데, 투쟁할 때 치열하고 당당한 분이었던 모습은 책을 통해서 봤습니다."
- 사형 당한 소식을 당시에 들으셨는지요?
"예, 그 당시 어머니한테 조 선생이 고국에서 사형 당하셨다는 얘길 듣고 너무 슬펐습니다. 제가 어려 자세한 내막을 몰랐고, 이해하기도 힘들었지만 말입니다. 슬펐습니다. 어머니께선 너무 머리가 좋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분인데 참 아깝다고 하셨습니다."
- 일본에서 조용수 추모사업과 명예회복을 위해 일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민족일보연대포럼'이란 모임이 약 1년 6개월 전쯤 만들어졌습니다. 저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용수 선생의 뜻을 생각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하고 있습니다. 현재 약 30명 정도가 같이하는 데, 일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 현재 과거청산 기본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고, 과거청산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민족일보 사건과 관련해 바라는 점이 있습니까?
"조용수 선생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조용수 선생께 자금을 줬다고 했던 간첩 이영근이란 사람은 노태우 정권 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궁화 훈장 받을 정도로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사람한테 자금 받은 것이 죄가 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훈장받은 사람 돈 받은 게 도대체 왜 죄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또 지금 민단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이영근씨 밑에 있던 사람이 많습니다. 너무 억울한 죽음입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힘쓰셨던 조 선생이셨습니다. 하루빨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 이민우 | | | | |
참석자들은 대표해 추도사를 맡은 김병태 전 중앙대 교수는 "지금 국회 앞에선 600여명의 민중대표가 무기한 단식농성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걸고 쿠데타 세력과 맞서고 있다"며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일찍이 열사님이 뿌려놓으신 통일운동의 씨알들이 자라 새 역사를 창조해 가는 과정일 것이니 지켜보시고 거두어 주소서. 지금 우리들은 2005년을 조국통일의 원년으로 열어갈 것을 맹세하고 온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동지들의 활동을 계속 지켜보시면서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전무배(전 민족일보 기자)씨는 지난 11월 25일 증보 발행한 '조용수 평전'인 <조용수와 민족일보>를 묘소에 헌정하며 반드시 진상규명을 이뤄내 고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이어 김자동(전 민족일보 기자) 위원장은 "반민족 반민주 군사정권에 의해 조용수 사장이 처형당한 지 어느덧 43년이 흘렀고, 젊었던 우리가 이제 다 백발이 되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라의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언론을 창설해 이끌던 분이 서른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그 뜻이 살아 민주주의가 승리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아무리 발악해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지 못할 것이고, 통일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이날 상주인 조용준(조용수 사장의 친동생)씨는 "바쁘신 가운데도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며 "현재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는데, 앞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더욱 힘을 쏟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김자동)가 마련한 이날 추도식엔 김정태(전 민족일보 논설위원)시와 전창일(1961년 당시 민자통 활동) 통일연대 고문을 비롯해 1960년대 혁신계 인사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 | 미래를 내다본 진보 언론인 조용수 | | | |
| | | ▲ 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 | 조용수는 1930년 경남 밀양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에 편입해 공부하였으며,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사와 국제타임스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56년에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자, 민단 내 일부 인사들이 조직한 '조봉암 구명위원회'에서 조직부 차장으로 활동했으며, 조국의 정치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50년 조국 땅에서 4·19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곧 귀국해 집안 어른들이 많이 살던 경북 청송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선거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요구마저 '공산당'으로 모는 현실에서 '올바른 혁신의 의미'를 국민에게 알리고자, 신문 창간을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1년 2월 13일 창간된 <민족일보>였다.
창간 직후부터 선풍적인 지지를 받은 <민족일보>는 장면 정권에 비판적인 글을 실어 탄압을 받았다.
5·16쿠데타로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열망을 짓밟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집행 전 그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민족을 위해서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하다. 정규근(친구이며 민족일보 상무) 동지에게 돈을 꾸어다 신문 만드는 데 썼는데, 갚아주지 못하고 가게 돼 미안하다."
어언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조용수와 함께 형을 선고받았던 인사들은 대부분 사면돼 정부 요직에 기용되거나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용수와 <민족일보>에 대해선 아직까지 복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이민우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