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146호 열린우리당] 농성장 칠판은 출석부
"국보법 연내 폐지와 국회 정상화를 위한 의원 모임. 참석의원은 여기에 자기 이름을 써 출석확인 바랍니다."
20일 '240시간 연속 의원총회'가 열리는 국회 146호 제4회의장 앞에는 '출석명단'이 적힌 칠판이 놓여 있었다. 오후 5시를 넘기면서 선병렬·우원식·유시민·이경숙·임종인·정봉주·정청래 의원 등 모두 35명의 농성 '출석' 의원들의 이름이 칠판을 가득 메웠다.
이날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농성장에서 즉석회의를 열고 김태홍·이경숙 의원을 농성단 공동대표로 선출했고, 총무위원장(선병렬 의원), 홍보위원장(이광철 의원) 등 농성단 집행부를 뽑았다. 집행부가 선출될 때마다 의원들의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의원들은 이후 농성장소에 대해 논의한 결과 146호실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본회의장 농성을 주장한 임종인 의원은 "이라크파병 반대농성 당시 국회의장석 뒤에서 잤더니 그 뒤로 의정활동에 자신이 생겼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회의장 바깥에서는 보좌관들이 플래카드와 스티로폼, 이불 등을 나르며 농성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우원식 의원은 "각 의원실에 있는 간이침대를 가져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농성장을 찾은 임채정 의원은 '출석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이 오죽하면 이렇게 나왔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똑같은 마음"이라고 공감을 나타냈다. 임 의원은 "'기호지세(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멈추지도 지속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안되도록 지혜가 필요하다"며 이후 농성의 완급조절을 주문하기도 했다.
마침 과거사기본법 공청회 때문에 국회를 찾은 역사학자 이이화씨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도 농성장을 방문했다. 김 교수는 "다수당이 농성까지 해야 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라며 "국정운영을 방해하는 한나라당은 차기 집권이 힘들 것"이라고 비난했다.
[본관 306호 한나라당] 사진 촬영도 거부한 채 '나라지키기'에 열중
같은 시간,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회 본관 306호 법사위 회의장에서 '나라지키기 농성'을 계속하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법사위 점거농성은 20일보 벌써 14일째를 맞았다.
이날도 한나라당 당직자들은 법사위 회의장 입구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다른 당 의원과 당직자는 물론, 기자들의 출입도 전면통제했다. '3당 농성'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한나라당만 빠뜨릴 수 없으니 사진촬영만 하자"고 요구했지만, 의원들은 무전기를 통해 "회의 때문에 찍을 수 없다"는 냉랭한 반응을 전해왔다. 결국 기자들은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철수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에 따르면, 법사위 회의장 안에는 의원 10여 명과 보좌진 및 당직자가 30여 명 정도 항상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사흘에 한번꼴로 순번을 짜서 법사위 회의장에서 교대 근무하고 있는데, 이날 밤에는 안택수 의원을 비롯한 10여 명의 의원들이 당번을 맡았다. 농성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교대로 식사를 해결하고, 세면과 목욕은 국회 내 샤워장을 이용하고 있다. 잠은 모포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자는데, 여성의원이라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당직자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당직자는 "고생스럽지 않냐"는 기자의 물음에 "집권 여당이 잘하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며 농성 장기화의 책임을 열린우리당에 돌렸다. 또 다른 당직자는 "열린우리당이 내년 1월 10일까지 상임위 소집요구를 해놨다고 하니 (4자회담 결과와는 상관없이) 일단 그때까지 농성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본관 145호 민주노동당] "너무 아늑한 곳에서 농성해 송구"
국회본관 145호실에서 '여야야합 저지와 개혁관철'을 위한 농성을 시작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바닥에 은박 매트리스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했다. 이 매트리스는 지난번 권영길 의원이 국회 본관 앞 단식농성 당시 사용했던 것이다. 이불은 국회에 구비된 모포를 얻어오기로 했다.
오후 내내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국가보안법 완전폐지' '국가보안법 연내처리'라는 구호가 앞뒤로 적힌 어깨띠를 맨 채 각 상임위별 현안 자료를 검토하며 농성장에서 의정활동을 준비했다.
오후 5시 반께 민주노동당의 농성장에는 국회 밖에서 농성하던 당원 30여 명이 찾아와 "국회 안팎에서 함께 투쟁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천영세 의원단대표는 "너무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앉아있는데, 바람이 거센 여의도 거리에서 목숨건 농성을 하시는 분들에게 송구스럽다"며 미안한 표정이었다.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은 농성장을 찾아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기본 구도조차 정리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각각 145호실과 146호실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승희 의원이 145호실에 들어오려다가 "우리 당이 아니네"라며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김혜경 대표, 김창현 사무총장 등 최고위원들도 농성장을 방문해 여야 4자회담 등 현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 사무총장은 아내인 이영순 의원이 자리를 비우자 "예쁜 의원이 안 보인다"고 말해 잠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6월 김선일씨 피랍 당시 이라크파병 반대농성을 시작으로 3차례 국회 농성을 벌인 바 있다. 한 당직자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이 각각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 국회의 상황에 대해 "국회가 '민주노동당화'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