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무 기자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명진출판)를 아픈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내용이 장남이지만 장남을 거부하고 룰루랄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더 이상 장남 생활에 찌들지 말고 '내키는 대로 살자' 뭐 그런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읽어보니 이 책은 그런 룰루랄라 장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어른들이 옛날에 생각했던 장남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는 성실하고 믿음직한 장남의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행간에서 장남 아내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자녀들의 눈물도 보았다.
장남 역할이 동생들이나 가족 친지들에게는 든든하기 그지없으나 그의 아내 입장에서는 오로지 수고만이 두 어깨를 짓누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로서는 자신들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장남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들을 성실히 수행한 얘기들로 채워져 있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자랑 같은 것은 별로 없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동생들 제 앞가림하게 도와주고 격려하고 또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시골 친척들을 구워삶는(?) 법 등 자신감 있고 상냥하고 듬직한 이 장남은 어딜 가나 팔방미인으로 환영받고 척척박사였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제수씨의 생일까지 챙기는 꼼꼼함은 물론 처가댁에도 잘한다. 사위가 미리 온다고 하면 이것저것 준비하시느라 부담스러울까봐 마침 지나는 길이라 들렀다면서 마실 것을 내놓으며 달콤한 말과 함께 용돈을 살짝 놓고 가는 애교에 어느 장모인들 넘어가지 않으랴.
처가에 하나를 잘하면 아내가 시가에서 열을 잘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실천했다. 그가 지금의 아내를 택한 이유도 심성이 곱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잘 모셔줄 것 같아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윤 기자 세대의 장남들은 배우자를 고르는 제일 조건이 둘 사이의 사랑보다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어줄 여자를 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친척 아저씨 중 한 분, 그도 여섯 형제의 장남이었다. 예전엔 결혼이 본인의 선택보다 그 부모의 선택이었는데 친척아저씨 역시 그의 아버지가 점찍어준 여자와 결혼하였다.
나이 드신 분들은 부모님 말씀이라면 대개 만족하며 따르는 것으로 보여 그 아저씨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랬는데 70을 바라보는 그 아저씨의 넋두리는 인생을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한스러웠다.
'지금의 마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아버지에게 사정했는데 아버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이가.'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를 읽은 사람들은 몇 해 전 나온 <장남과 그의 아내>(새물결)를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가 장남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거기서 보람을 느끼는 장남의 입장만 있다면 <장남과 그의 아내>에는 장남의 입장과 그 아내의 입장 둘 다 있다.
<장남과 그의 아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장남부부 33쌍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장남은 그의 아내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장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장남과 그의 아내>는 장남과 그의 아내만이 아닌, 결혼을 했거나 또 앞으로 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이다.
'아, 우리의 갈등이 사실은 이런 카테고리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었구나' 혹은, '결혼 속에는 그동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런 갈등도 있구나' 등등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를 읽고 나서 나는 윤영무 기자보다 윤영무 기자의 아내에게 짠한 마음과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나는 여자이므로 그리고 대한민국의 많은 아내들은 그녀의 마음을 알 것이다. 윤 기자가 차기작으로 '장남의 아내도 행복했다'라는 행복한 책을 쓸 수 있게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