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민족이나 개인은 절대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과거청산이라는 건 잘못을 앙갚음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진로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올해 말(31일) 퇴임하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 한상범(68) 위원장이 과거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한 위원장은 "과거청산이 안되니까 친일파들이 부정과 부패로 기득권을 누리고 총칼로 민주주의를 압살한 부류들이 정권을 잡았다"며 그 결과 "도둑질, 강도를 하더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식으로 사회정의와 윤리가 실종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위원장은 대학교수 시절인 1964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과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해 3선개헌·유신 반대 등 반독재 운동에 참가했기도 했다.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보더라도 벌써 40년 세월 동안 과거청산 관련된 일에 정진한 셈이다.
퇴임을 나흘 남겨둔 27일 오후 한상범 위원장을 의문사위 위원장실에서 만나 의문사위 활동에 대한 소감과 과거청산 현안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봤다.
"일제잔재 청산 없이 민주주의도 인권도 안돼"
- 의문사위 위원장을 역임하기 전부터 꾸준히 과거청산과 관련된 학문적 연구를 해 오셨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과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청산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는지요.
"52년 부산정치파동 자유당 1차 개헌 때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란 게 독재자 아니냐'하고 얘길 했어요. 젊은 혈기에. 그랬더니 '나랏님을 비방했다'고 해서 경찰서 사찰계에 끌려가서 시달렸습니다. 걸핏하면 빨갱이나 좌익으로 몰던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경찰 간부들을 보니 전부 일제시대 앞잡이 하던 놈들이 일제 때보다 더 출세해서 앉아 있는 거예요. 이건 잘못됐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면서 인권에 대해 몰두해 연구를 했습니다. 인권이란 게 민주주의가 없으면 안 되는데, 우리 사회에선 일제 앞잡이 했던 자들이 권력을 틀어쥔 채 민주주의를 막아 나서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일제잔재 청산 없이는 민주주의도 인권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과거청산을 평생의 학문 과제로 삼았습니다."
- 과거청산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지적이신데요. 하지만 수구세력들은 '지난 일을 뭐하러 끄집어 내느냐', '경제나 신경 써라'는 식으로 반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에선 일제가 물러간 뒤 친일파, 특히 만주 중심의 활동을 한 친일세력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이 만주국에 경험했던 군사통치수법을 그대로 써먹었습니다. 그래서 숙련된 군사통치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경제의 세계적인 변동기에 박정희가 집권을 해요. 그 결과 경제발전 과실을 박정희의 공으로 주장하는 세력도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흐름의 일부이고, 우리 국민 노동자와 농민, 재벌 주도의 경제개발에 희생됐던 사람들의 공로입니다. 박정희 공로가 아닙니다.
과거청산이 안되니까 친일파들이 부정과 부패로 기득권을 누리고, 총칼로 민주주의를 압살한 부류들이 정권을 잡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도둑질, 강도를 하더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식으로 사회정의와 윤리가 실종된 것 아닙니까.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민족이나 개인은 절대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과거청산이라는 건 잘못을 앙갚음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진로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없으면 민주주의와 인권은 물론 통일도 없습니다.
일제잔재와 군사잔재, 독재잔재를 놓아두고 21세기 국제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습니다. 과거청산은 민족통일과 국가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청산은 통일과 국가생존 위해서 꼭 필요"
- 지난 1기에 이어 2기 의문사위를 이끌어 오셨는데, 우선 1기 위원회 사건 중 기억나는 사건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허원근 사건하고, 김준배 사건, 장준하 사건, 최종길 사건 등이 사회적 관심을 끌었던 사건인데, 그 중 김준배 사건과 최종길 사건은 인정 결정이 나왔지요.
허원근 사건은 법의학이나 총포학의 기본 원리원칙에 맞지 않는 거였습니다. 법의학자들과 LA경찰국의 총기전문가한테도 의뢰했는데 M16으로 세 발이나 쏴 자살한다는 건 전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국방부의 정수성이란 사람은 기자회견에서 의문사위 조사가 전부 날조라고 말했거든요. 이건 명예훼손이고, 사건을 재은폐하는 행위였습니다.
또 김준배 사건을 인정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한총련이 이적단체 구성원이니 잘못됐다는 식의 논리거든요. 김준배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관이 막대한 사비로 프락치를 고용했다는 게 드러났지요. 포상과 특진 때문이었어요.
프락치가 김준배한테 접근을 해서 유인한 뒤 체포되게 하려 했던 건데, 프락치인 게 드러날까봐 그 사람도 구속했다가 풀어줬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여기저기서, 공기관에서도 왜 한총련 편을 들어주느냐는 압력이 들어왔어요. 당시에 백주대로에서 '네가 뭔데'하는 식의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장준하 사건과 관련해 말씀드리지만 사실 제일 중요한 정치적인 탄압은 그 기관(중앙정보부, 현 국가정보원)에서 한 거예요. 그리고 쌍벽을 이뤘던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가 많은 정치공작을 하고 일을 저질렀거든요. 그런데 그 두 기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는 전혀 협조가 안됐어요.
당시에 누가 그러더군요. 대통령(김대중)이 자기가 대통령인데도 그 사건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데, 당신이 뭘 하겠다는 거냐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다가 관두면 관뒀지 하는 데까지는 해 본다'는 게 당시 혼자서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 2기 의문사위 활동 결과 진상규명 불능 사건은 24건, 기각 7건, 인정 11건이었습니다. 인정된 사건보다는 기각되거나 불능 결정난 사건이 상당히 많습니다. 조사권한과 조사시한이 턱없이 미약했다는 점은 많이 제기됐는데, 그 외에 이처럼 불능 결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근본적으로 오래된 사건이고, 관련자들이 죽거나 기억이 희미해진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 또 국가공권력이 자행한 사건이거든요. 국가공권력은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백서를 쓴 적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감추려는 사건, 그걸 파헤치는 거거든요.
다음으로 우리 위원회 위원 중 변호사가 3명 이상입니다. 사건 결정이 법원의 증거 채택에 준해서 이뤄졌습니다. 사실 의문사 사건은 어디까지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처벌하기 위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의문사위는 법원이 아닌데도 법원처럼 엄격한 증명을 전제로 결정을 하다보니 불능 결정이 많았습니다.
그 한 예로 2기에서는 김성수 사건이 인정되긴 했는데, 법률가들은 다 반대했습니다. 장준하 사건도 정황 증거 등으로 상당 부분은 인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불능으로 남았고요.
거기다가 민간조사관과 파견된 공무원들이 조사방침이나 방법에서 하모니가 안 됩니다. 용케 그래도 서로 자제를 해서 지내왔지만. 같은 사건을 함께 조사한 민간과 파견 공무원이 다른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똑같은 사건을 두고."
- 2기 의문사위에서 가장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던 사건은 아무래도 비전향장기수 관련 전향공작 옥사사건(손윤규, 최석기, 박융서 사건)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7월 1일 사건 브리핑 이후 수구세력은 '간첩, 빨치산이 민주인사라니'라는 식으로 의문사위 때리기'가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에도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텐데요.
"기자회견 다음날(7월 2일) 출근해서 중앙일보를 받아 봤어요. 언론과 극우의 반발은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지요. 그런데 이건 '간첩'이니 '빨치산'이니 하며 전력을 문제 삼잖아요. 다른 건 그렇다치더라도 과거 전력 때문에 문제 삼는 건 도저히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가 없는 일이거든요. 이건 곧 좌익 빨갱이는 법률로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식의 위험천만한 논리입니다.
좌익 혐의만 갖고 사람이 맞아죽어도 좋다는 식의 사고는 육이오 때 보도연맹은 빨갱이니까 죽여도 좋다고 했던 논리와 같은 거예요. '명색이 민주화시대라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하는 생각과 디제이 시대 최장집 교수 사례도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했지요. '여기서 물러나면 민주주의고 뭐고 다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헤쳐나가자 결심을 했고, 직원들에게도 '흔들리지 말고 의연하게 대응하라'는 얘길 했고요."
- 지난 7월 6일 오전에 예비역 장군 모임인 성우회와 간담회를 가졌고, 그 날 오후엔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지난 1기 때 변형만 사건 등에 대해 '간첩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결정을 했는데요. 그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화보상심의위의 결정 내용에 대해선 예상했던 거예요. 그런데 시기적으로 왜 하필 그날이냐 하는 것이 유감스럽고 의아스러웠습니다. 또 우리 사회 수준이 아직까진 이것밖에 안되나 하는 비애감도 들더군요. 그 결정은 사상 차별이고 사상 추단, 예단이거든요. 이런 사상적 편견이 민주주의적인 결정일 순 없지요."
"법원처럼 엄격한 증거 채택으로 불능사건 늘어"
- 7월 한 달간 수구세력들이 거의 날마다 협박 전화를 비롯해 의문사위 앞에 와서 시위도 하고, 체포조를 결성해 납치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식의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심정은 어떠셨나요.
"체포조 구성 소식을 보고 받은 뒤, 관계기관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경호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반공진영에서 우리의 진의를 곡해해서 그러는 거다. 경호는 필요 없다'고 말했어요. 또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경호를 한다고 해서 못하겠느냐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빨갱이라면 고소, 고발을 하면 됐지. 체포조니 하는 건 이건 일종의 납치를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관계기관에서 그 극우세력한테 '하지 말아라'하고 경고를 했다는 소리를 못 들어봤어요. 이거야말로 이해하기 힘든 일 아닙니까. 국가기관이 공공연히 협박을 당하는데. 또 상이군경이란 사람들이 위원회에 와서 기물파손하고 소란을 부렸잖아요. 그런데도 경찰이 그 극우세력들을 어떻게 조사했다는 얘기도 없고. 참."
- 최근 국정원을 비롯해 경찰쪽에서도 자체적으로 과거 의문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겠다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과거청산에 물을 타기 위한 시도라는 지적도 있고, 어차피 누군가는 할 일인데, 국정원 안에 들어가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뭐 취지나 말은 논박할 여지가 없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생길 때부터 온갖 정치공작을 했으며, 매번 선거에 관여한 부정선거의 장본인이었고, 김대중 납치사건 등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것들을 먼저 다 백서를 통해 잘못을 시인하고 국민의 의혹을 풀어야지요. 자기들이 갖고 있는 자료를 갖고 일단 명명백백한 백서를 발간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라 이거예요.
백서에서 잘못된 거 미흡한 게 있으면 국민들이 '이것도 밝혀 보라' 요청을 해서 조사를 해야지. 새삼스럽게 여태 가만 있다가 뭘 조사한다고 그러는 건지. 일의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위원회가 국정원에서 자료 협조 받은 게 거의 없어요. 그런 비협조 사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고,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해 조사하겠다는 게 아니라, 의문을 제기하는 쪽의 꼬투리를 잡으려 하는 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과거청산 시간 끌기고 김빼기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는 것 아닙니까."
"필요로 한다면 백의종군할 각오"
- 이제 임기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퇴임 후 무슨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요.
"우선 책을 내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 동안 읽지 못한 책도 읽고 하면서 지내려 합니다. 또 2002년 4월 18일 집무 시작했으니, 한 3년 되었는데, 그 동안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해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당분간 좀 쉬면서 건강도 챙기고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느 일이건 백의종군할 각오입니다. 평생 과제가 과거사 청산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