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김형태


이후로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교제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몰래 몰래 연락하고 만났다. 나야 아무래도 괜찮았지만 그녀가 나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내릴 것 같아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가 서로 사귀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는 캠퍼스 내에서나 대학가 주변에서는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학교 안에서는 어쩌다 만나도 서로 모르는 척했다. 주로 밤에 내가 그녀의 하숙집 앞으로 찾아갔다. 뻐꾸기 소리를 내거나 창문을 세 번 두드려 그녀를 불러내었다.

우리는 그녀의 하숙집에서 조금 떨어진 라일락 나무 아래 앉아 별빛을 보며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마침 라일락꽃이 활짝 피어 그 꽃내음이 사위(四圍)를 뱅뱅 소금쟁이처럼 맴돌았다. 우리는 그렇게 얘기에 취하고 진동하는 꽃향기에 취했다. 그 때 '젊은이는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얼마간은 내가 이야기를 주로 했다. 그러면 그녀는 초롱한 눈빛으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야기할 때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웃음 지을 때마다 달빛이 그녀의 희고 고운 이에 와서 부딪혔고 별빛이 그녀의 패이는 보조개에 와서 담겼다.

정말 새하얀 치아가 시리도록 빛났다.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한창 피어오르는 싱그러운 신록 같았다.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좋아 자꾸만 얘기했고, 그녀는 지루한 줄 모르고 내 얘기를 들으며 웃어 주었다. 그녀를 알게 되면서 어느 순간에 나는 수다꾼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다니 사실 나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사랑잡기

잠자코 기다리면 오겠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찾는 사랑은 꼴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사방팔방 다 돌아다녀도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못 찾았다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은 꼭꼭 숨으라고 외쳐대는 술래
도대체 어디에서 은거하고 있는 것일까?

온종일 걸어 다녀 손에 쥔 것은 허탈감 뿐
수명을 다해 가는 나의 청춘이 불쌍하다
이러다 혹시 가슴 벅찬 사랑 한 번 못해보고
젊음을 날려 보내는 것은 아닐까?

아, 술래잡기도 아닌 사랑잡기는 이제 그만
이제는 정말 너를 만나보고 싶다
너를 만나 내 사랑임이 확인되는 순간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리라
어디 갔다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혹시 네가 그것도 못 찾고 뭐 했느냐고 꼬집으면
무어라 대답할까?
‥‥‥‥‥‥‥‥‥

한번은 나의 이 '사랑잡기'라는 시를 보여주었더니 그녀가 얼굴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차마 어떻게 그녀의 백옥 같은 뺨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표현이지. 오히려 그녀가 얼굴을 내게 내밀 때, 선홍빛 입술이 하도 함초롬하여 솔직히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왜냐하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 한번은 내가 그녀에게 장차 꿈이 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되고 싶어요, 좋은 엄마‥‥‥."

세상에!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꿈이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뭐 교사나 기자가 되고 싶다든가 아니면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다든가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엄마가 되고 싶다니 그것도 갓 스물인 처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대답에 내가 멍청하게 있자,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왜요? 이상하게 들려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뜻밖이라서‥‥‥ 그런데 어떻게 그런 꿈을 갖게 됐어요?"

내가 어렵게 되물었다.

"별 뜻 없어요. 그냥 저는 아이들이 좋아요, 할 수 있다면 빨리 결혼해서 아이들을 많이 낳고 싶어요. 상상해 봐요. 얼마나 신나고 보람 있고 또 가치 있는 일이에요."

"그래도 요즘 여자들은 누구 아내, 누구 엄마로 살기보다는 자기의 인생을 살기 원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별로 식구가 없는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식구가 많은 집에서 사람 사는 것처럼 한번 떠들썩하게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위로 언니 하나, 밑으로 아주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래 내가 "그럼, 세 자매네요?"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의 말인 즉, 언니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영리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아주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는 언니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었단다. 자기가 못 이룬 꿈을 큰딸이 이루는가 싶어 기대가 무척 컸단다.

그런데 그런 언니가 중3 때인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독서실에서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다가 그만 달려오는 차에 치어 목숨을 잃었단다. 그 후 집안 분위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고 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장녀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는데 한순간에 큰딸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리자, 한동안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었단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 안타까워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도저히 언니를 따라갈 수 없었단다.

그래서 음악은 그녀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서 어머니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음악이 전공이자 결혼 전까지는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며 의외로 그러라고 하더란다.

언니의 빈자리를 자기로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럼 대체 어떻게 하여야 집안분위기를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 문제에 골몰했단다. 그러다가 중2 때 한번은 연산집에 갔는데, 할머니가

"엄마한테 가면 동생 하나만 낳아달라고 해라."

지나가는 말로 그러더란다.

"그래, 그것이다! 왜 여지껏 그 생각을 못했지."

물론 할머니는 손자를 얻고 싶은 욕심에 한 말이었겠지만, 어머니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는 일이라면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날부터 동생 하나만 낳아달라고 철부지처럼 졸랐단다.


* 17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