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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편해질거야"

3개월째 준수를 간병하며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생활하던 아내가 잠시 내려왔습니다. 암 수술을 받으신 시아버지도 뵙고 간병으로 지친 몸도 잠시 쉬어갈 겸 내려온 것입니다.

아내가 내려오기 전에 둘째 녀석과 함께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정리했습니다. 간병으로 지친 아내가 와서 조금이라도 편히 있다 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집에 도착하던 첫날밤만 일찍 잠자리에 든 것 외에는 잠시도 앉아 쉬지 않고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새벽녘에 거실에서 인기척이 있어 잠이 깼습니다.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와 보니 아내가 마늘을 까고 있었습니다. 좀더 쉬다 천천히 하지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 했더니 많이 쉬었다고 했습니다. 암 수술을 받으신 아버님 병구완에 좋다는 음식도 준비해야 하고 배변 장애로 먹는 걸 힘들어하는 준수 녀석 입맛을 돋굴 수 있는 반찬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답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이 고마워서 마주앉아 마늘을 깠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도란도란 이야기도 했습니다. 준수 녀석이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실려간 게 작년 10월 7일이었으니 그 뒤로 병실이 아닌 집에서 마주앉아 대화하는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암 환자들에겐 먹는 음식이 참 중요하다는데…."
"중요하지."
"준수만 아니었으면 아버님 병구완 잘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도란도란이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 그 대화가 우리의 현실을 벗어날 순 없습니다. 맏며느리라는 상황에서 준수의 간병에 매달려 두 번의 수술과 함께 치료를 받고 계신 시아버님께 할 도리를 못한 데 대한 아내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준수 간병에 최선을 다하면 돼. 아버지는 내가 잘 돌봐 드릴 테니."
"그래도 내가 가까이에 있으면 더 나을 텐데."

아내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남자인 내가 아무리 잘해드린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방학을 맞은 둘째 광수와 함께 밥해 먹고 생활한 게 며칠 되었습니다. 광수는 아빠가 끓여준 청국장이 맛있다며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새해 맞이 기념으로 치악체육관에 가서 삼보 엑써스의 농구 경기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손길에서 벗어나 석달을 보낸 녀석이 안쓰러워 잘해 주려고 애를 쓴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나의 정성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는 걸 아내가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아내는 도착해서 광수를 끌어안고 몸을 쓰다듬어주며 못다한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뒤에 광수에게 덧니가 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젖니를 제때 빼주지 않아 덧니가 젖니를 밀고 올라오고 있다는 겁니다. 밥 잘해 먹이고 함께 놀아주기만 하는 게 아빠 노릇의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암 수술 후 통원 치료를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 드리려 해도 음식 준비나 정성이 아내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아버지의 간병을 맡길 형편도 아닙니다. 준수의 간병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늘 껍질을 벗기며 아내에게 얘기했습니다.

"아버지의 병은 하루 아침에 나으시는 게 아니잖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길게 생각하자. 당신은 준수 간병에 최선을 다하면 돼. 나는 아버지를 지켜 드릴 테니."

준수의 회복이 조금씩 빨라진다는 소식을 들으면 암 투병 중이신 아버지의 얼굴에도 웃음이 보입니다. 아버지의 치료는 앞으로 5년을 내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준수의 회복이란 생각도 듭니다.

조급하게 허둥대다 지쳐 주저앉기보다는 차분하게 현실을 돌아보며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내 생각을 이해한 아내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식탁 위엔 아내와 내가 까놓은 마늘이 그릇에 수북히 담겨 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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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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