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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제씨 가족이 웃고 있다. 우씨의 희망도 이들 가족의 얼굴표정만큼이나 환하다.
우호제씨 가족이 웃고 있다. 우씨의 희망도 이들 가족의 얼굴표정만큼이나 환하다. ⓒ 이우성

지금 그의 나이 34살, 농사 경험은 무려 17년째.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농사꾼을 장래 희망으로 안고 살았다. 자신이 가야할 큰길을 정하고 우직하게 소처럼 천천히 그 길을 걷는 우호제씨. 발걸음이 오늘은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

오순도순 4대가 함께 고향마을을 지키며 예쁘게 살고 있는 50호 되는 우가 씨족마을, 홍성 장곡면 가송리 가실마을 언덕 위 하늘을 닮은 파르스름한 그의 집을 찾아 젊은 농부의 힘이 실린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학교 갔던 정민이(8)와 유치원생 태식(6)이가 건강한 웃음을 흘리며 씩씩하게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 아이들은 아빠가 농사 지은 친환경쌀로 학교급식을 먹고 있다.

이곳 생산자들이 기금을 조성해 친환경쌀과 차액만큼 보전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약 안 친 건강한 엽채류도 곧 급식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집에서와 똑같은 밥상으로 밥을 먹으며 더욱 밝고 건강하게 웃을 것이다.

젊은 부부 우호제·김회령씨 부부는 2004년 6월에 새로 집을 지어 아버지 집 근처로 입주했다. 아흔 되신 할머니와 항상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4대가 살다가 현대식 외양간을 새로 지은 곳 옆에 신식 집을 지어 자신들만 분가를 했다.

분가라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사는 집과는 직선거리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아 창을 열고 소리쳐 부르면 알아듣고 달려올 거리다. 부인 김씨는 점심 준비를 위해 본가로 급히 달려가 맛있는 밑반찬을 들고 다시 언덕을 바삐 올라온다.

유기 사료로 소 키워

제일 주력하고 있는 농사는 소다. 송아지, 암소, 수소 모두 합쳐 34마리. 유기축산을 꿈꾼다. 2003년 10월부터 유전자 조작되지 않은 사료 ‘참여물’을 먹이고 있다.

참여물은 일반사료보다 비싼데 그 차액을 여성민우회생협 소비자들이 보전해준다. 2004년 4월부터 처음 참여물 사료를 먹고 자란 소를 월 10마리씩 여성민우회생협에 납품하고 있다.

2005년부터는 생협작목반에서 입식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 2만평에 총체보리를 심어 조사료로 먹여 육질을 높이고 전환기유기 이상의 볏짚을 확보했다.

30대 젊은 친구들 7명이 모여 풀무유기축산영농조합법인도 새롭게 만들어 서로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환경농업을 하는 농민이 많아 유기순환농업이 가능한,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지역이다.

논 6000평을 유기로, 4600평을 전환기유기로 벼농사를 짓고 있고 밭 1500여평에는 취나물, 애호박, 당근, 두릅을 키워 잘 말려 풀무생협으로 낸다. 밭 규모는 점차 줄여나갈 계획이다. 일년 수입은 대략 쌀 수매자금이 5000여만원대. 엽채류가 1000만원, 기타 농기계수입이 있다.

공주농고 자영농과를 졸업하고 줄곧 농사를 지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방황할 때 자신을 이 땅에 굳건히 두 발로 설 수 있게 해준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혈기 가득할 때라 아버지와 왜 갈등이 없었겠는가만 아버지는 늘 드넓은 들판이었고 가지 뻗어 그늘 많은 당산나무였다. 늘 아들을 이해하는 그 깊고 속넓은 마음을 이제사 그는 알게 되었다.

“농사지어 풍족하게 살지는 못해도 일년에 논 한 마지기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면 마음은 풍족할 것”이라는 아버지 말씀대로 그는 지금 산다.

초등학생 때 장래희망이 농사꾼

그는 농업학교에 다닐 때 실습을 많이 다녔다. 주로 농사 잘 짓는 독농가를 찾아가 직접 일을 배웠다. 양봉, 화훼, 젖소 키우는 일 따위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졸업할 무렵 300만원을 들여 60평 규모의 축사를 짓고 돼지를 키웠다. 5년간 돼지를 키웠는데 언제부터인가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돼지를 키우는 데도 엄격한 시설관리가 요구되었다.

그래서 홍성지역에 이미 숫자가 많은 돼지보다는 소를 키우자고 결심하고 자재를 사다가 직접 소 축사를 지었다. 이왕이면 제대로 하자고 생각하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축사 짓는 법을 배워 신식 우사를 지었다. 소 한 마리당 3평 정도가 유기축산에 적당한데 우씨는 20평 한 방에 4마리를 넣었다. 효율성은 떨어지더라도 자유스럽게 소를 키울 수 있었다.

소똥은 보통 열흘에 한번씩, 봄가을에는 3개월에 한번씩 한꺼번에 치워 잘 모아두었다가 뒤집기를 잘 하여 거름으로 낸다.

유기농사는 5년차. 밭은 하우스 300평에서 전환기유기로 당근을 키우고 애호박과 취나물을 심어 말려서 생협에 낸다. 모두 가족노동력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다하는데 노력한 만큼 대가가 나오지 않는다. 늙은호박, 맷돌호박, 나무두릅도 조금 심었는데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이제 당근 중심으로 작부체계를 바꿀 생각이다.

지난해 봄에는 비가 많이 와서 수확량이 없었고 가을에는 작황은 좋은데 소비가 많지 않아 별 큰 재미를 못 보았다. 당근도 풀무생협 작목반 차원에서 가공계획을 세워 스낵으로 가공하면 좋을 듯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씨는 4남매의 셋째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장래희망을 농사꾼으로 삼았다. 동네 친구들도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결국 꿈을 이루었다고 격려해준다고.

그는 아버지를 항상 고마운 존재로 생각한다. 그를 이렇듯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주신 분이기 때문일까. 어릴 때 아버지도 소를 많이 키웠는데 아들이 외양간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한 대가를 주셨다.

그리고 고향 내력을 구수하게 다 말씀해주셨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소 키우는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을터. 그도 자신의 아이들이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기꺼이 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진학을 앞두고 모든 결정권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 스스로 농업학교를 택했다. 지금도 그 결정권을 준 아버지가 한없이 존경스럽다. 그때 학교 선생님께서 근처 청양농고보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공주농고를 권했다. 그래서 공주농고로 진학을 했는데 농고 3년 동안의 경험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졸업 전 가정실습 동안 밭작물이 제값을 못 받아 회의적인 생각을 많이 했는데 풀무생협에 참여하면서 큰 전환점을 맞는다. 소비자 식구들과 교류하면서 투명한 만남에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

요즘 생협 일이 참 재미있다. 가송리 쌀작목반에는 17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주로 6월 6일 오리입식 행사와 10월 3일 나눔의 잔치 큰 행사는 성남주민생협 소비자와 3년째 친분을 맺고 있다.

홍성이 고향인 아내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농업기술센터 장곡지소에서 근무하던 아내를 당시 지도자 생활하던 아버지가 먼저 반해 사탕을 줘서 꼬셨다고(?).

그런데 여자라고 힘든 농사일 봐주는 법이 없었다. 농군의 아내면 농사일 다해야 한다고 여름내 힘든 일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씨는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는지 그저 아내가 하는 대로 지켜본 것 같다. 시킨다고 하면 오래 못 가기 때문. 아내는 스스로 체력을 키워나갔다.

지난해 벼농사는 작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년에 잘 짓자” 딱 한 말씀만 했다.

해충관리는 오리와 우렁이로

“논밭에 되도록이면 자재들을 많이 안 낼려고 합니다. 우리 집 소똥에 왕겨, 톱밥을 섞어 충분히 뒤집기 하여 발효시켜 넣어주고 특별히 병 관리를 위해 자재를 넣어주는 일은 없습니다.”

하우스에는 300평에 10톤 정도 소똥을 넣고 땅 관리만 잘 해주면 당근 따위는 절로 되었다. 소똥을 못내는 논에는 유박을 낸다. 찰벼, 흑미는 유박이 조금만 있어도 잘 자란다.

벼농사는 못자리만 성공하면 제일이다. 지난해는 흙살림 ‘싹나라’ 상토에 팽연왕겨, 산흙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토로 썼는데 대성공이었다. 앞살림4호를 파종할 때와 논에 나갈 때 두 번 뿌려주었는데 곰팡이가 전혀 없었다.

오리와 우렁이를 병행하는 것이 이상적으로 본다. 초기에 논둑을 높이고 넓고 고르게 하고 끝자락만 보일 정도로 물만 깊이 대주어도 잡초는 어느 정도 잡는다. 오리는 1200평에 100마리 정도, 우렁이는 30~40kg 정도 넣는다.

해충관리는 따로 하는 것이 없다. 동력제초기를 구입해 못 잡은 풀을 잡을 생각이다.

농촌 현실을 둘러보면 기계 많은 집은 빚 많은 집이다. 그도 그걸 잘 안다. 콤바인, 트랙터를 일부 보조받아 사지만 융자는 그대로 빚으로 남는다. 쌀농사를 아무리 지어봐도 기계 빚을 갚을 정도의 소득은 감감하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아는 그는 기계도 중고로 바꿨다. 농부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농기계 살 때 꼭 신중히 생각하고 사라는 것이다.

그는 마을 앞 오서산에 나무하러 다녔던 아버지에게서 어릴 때부터 배운 농사철학을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힌 것 같다. 위를 보며 살지 말고 자기만족하며 평범하게 사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식구들 건강하게 살면 최고라는 것. 가진 것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웃고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할 때는 이미 그의 아버지 목소리와 같으리라.

“부나 명예 같은 욕심 부리지 않고 건강하게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 이곳 가송리 가실마을에 오래도록 살고 싶습니다.”

정직하게 농사지으며 천직으로 가실마을 땅을 지킬 그의 소박한 꿈은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한다. 뼈아픈 농촌현실이지만 이런 소망마저 저버린다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아버지와 그의 식구들이 빛나는 해를 맞으며 해를 보며 종일 묵묵히 걸어갈 가실마을에 축복이 내릴 것을 우리는 안다.

유기축산으로 키우고 있는 우씨의 소. 자유롭게 자라서 그런지 매우 건강해 보인다.
유기축산으로 키우고 있는 우씨의 소. 자유롭게 자라서 그런지 매우 건강해 보인다. ⓒ 이우성

덧붙이는 글 | <흙살림신문> 신년호에도 실렸습니다. 이런 분들이 시골에 많으면 우리 농업, 우리 농촌, 우리 농부들 근심걱정없을 텐데요. 그렇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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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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