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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디 않았서? 내래 한 스무 놈은 쏴 죽인 것 같은데 잘 세어 보았네?”
"내래 돌을 던져 오랑캐놈들 머리를 까부수느라 잘 못 봤는데, 아버지 활 솜씨래 어디 가겠습네까?”
하루 종일 전투를 하느라 노곤해진 몸을 추스르며 성곽에 기대어 밥과 국을 먹는 장한본 부자는 서로를 믿음직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무용담을 나누었다. 이 전투에서 용골산성의 조선군 민병은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을 뿐이었지만 후금군은 팔백여 명이 전사하고 수 천 명이 부상을 입는 등 조선에 진군한 이래로 최초이자 최대의 큰 피해를 입었다.
“내 어머니와 동생들은 지금쯤 무얼 할런지….”
아버지의 말에 장판수는 그만 숟가락을 멈추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장한본 역시 배라도 부르니 헤어졌던 가족이 생각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망할 오랑캐놈들.”
장한본은 화난 표정으로 밥그릇을 내동댕이치듯이 내려놓고서는 아들에게 등을 돌렸다.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후금군은 패배의 상처가 큰 듯 며칠간 용골산성 인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용골산성의 민병들은 성곽을 수리하고 무기를 손질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큰 승리를 거두어 비록 사기는 드높았으나 군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화살은 부족했으며, 화약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도는 분명 다음에 성을 공격할 만한 기구를 갖추어 이곳을 들이칠 터인데 이를 부수고 불사를 화약이 부족하다. 석거포(石車砲 : 투석기)를 만들어 마땅히 대비해야 한다.”
정봉수는 성안의 민병들을 다독이며 준비를 서둘렀고 첫 전투가 있었던 8일 뒤, 후금군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안의 백성들은 들어라!”
너무나도 분명한 조선말이었기에 성벽에 기대어 적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민병은 슬쩍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50여 기의 후금 기병을 이끌고 온 이는 분명 관군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최유라는 용천 군관놈이구먼. 언제 오랑캐에게 빌붙었누. 가이삿기.”
민병들은 별 동요 없이 최유를 비웃으며 정봉수에게 지시받은 대로 여간해선 성벽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최유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벽을 향해 소리쳤다.
“성안의 백성들은 들어라! 이미 대(大)금의 왕자님께서 친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속히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곳을 짓밟아 모조리 어육으로 만들진저….”
더 이상 허튼 소리를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성에서는 포를 쏘았고 최유를 비롯한 후금의 기병들은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성안의 포 소리가 전투 신호라도 된 듯 얼마 후, 후금의 군대가 진영을 갖추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울리며 운제(성을 오를 수 있는 사다리차)를 선두로 서서히 진군해 왔다. 처음의 무모한 공격과는 다른 후금군의 모습이었지만 성안은 여전히 조용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활을 든 채 자세를 낮추고 적을 노려보는 장한본은 아들에게 겁을 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봉수의 심정은 아들이 용감히 싸우기 보다는 몸을 피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장판수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불타올랐다.
“걱정 마시라우요. 아버지, 저 오랑캐놈들은 제가 곱게 살려서 보내지 않을 거라우요.”
후금군은 일단 갖추어진 진영을 다시 나누어 용골산성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포진했다. 8일 전처럼 무모한 공격을 나누어진 병력으로 몇 곳에 거듭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이번에는 많은 병력으로 한 번에 들이닥쳐 성을 격파할 심산이었다.
장한본은 이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며 과부와 정을 통하다가 사람들에게 들켜 알몸으로 망신을 당했던 마을의 생원이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 같다(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진다는 뜻)'는 말을 하며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 애썼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어이없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버지, 갑자기 와 웃습네까?”
장판수가 의아한 듯 묻자 정성본은 대답 없이 입에서 급히 웃음을 거두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는 것 같이 보이면 아들이 이를 믿고 자신감을 앞세워 무모한 행동을 할지도 모를 일이라는 염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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