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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유치원 셔틀버스에 태워 보내고 돌아오다 보니, 아파트 출입구 옆에 서 있는 키 작은 측백나무가 제법 크리스마스트리 꼴을 하고 있었다. 환갑을 한참 넘겼겠다 싶은 경비 아저씨는 체구가 작고, 조용한 사람인데, 어제 저녁 내내 쭈그리고 앉아 재활용품 수거함을 뒤진다 싶더니 트리에 낡은 인형들이 조롱조롱 날개를 달고 천사가 되어 매달려 있었다.
아저씨 손재간이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트리 둥치 언저리에는 세 개의 작은 촛불이 세워져 있었다. 오후엔 금박 종이를 오려 붙인 헌 양말이 매달렸다. 양말 속에는 도토리와 땅콩이 소복소복 들어 있었고 알록달록한 백화점 포장지를 엮어 만든 별과 십자가가 트리 꼭대기를 장식했다. 나를 무척 즐겁고 유쾌하게 해준 그 크리스마스트리 때문에 그날 오후 주민회의가 소집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운 나쁘게도 부녀회장과 주민대표를 엘리베이터에서 연달아 만났다. 나하고도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니 내키지 않아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여니 참석자는 많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다른 참석자들의 표정이 벌써 모종의 합의에 도달한 듯 단호한 것을 보고,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모임을 주관한 주인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모이시자고 한 거는, 저기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 그 아저씨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런 겁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예감을 확인해 주듯, 다른 참석자가 말 끊어지기 무섭게 말을 받았다.
“아니 그 아저씨 도대체 왜 그런대요? 여기는 아파트잖아요. 트리 앞에 촛불까지 켰더라고요. 그러다 화재라도 나면 어떡해요? 경비 아저씨가 그런 상식도 없으면 어떡해요. 여러 사람이 사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자기 종교 생활을 하면 어떡해요. 여긴 그 사람 직장이라고요. 직장에서 할 일은 안 하고 종교 활동이나 하고. 그러니까 아파트에 자꾸 교회 다니라는 사람들이 들락거리지. 새댁, 새댁도 절에 다니죠? 제선사에서 내가 몇 번 얼굴을 봤거든.”
그제야 나는 내가 이 모임에 불려온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불교 신자가 맞지만, 경비 아저씨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문제 삼을 만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명확히 이 자리에서 경비 아저씨의 편을 들어줄 만큼 적극적인 사람도 아니라서, 나는 그저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른 한 참석자가 입을 열었다.
“꼭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저 아저씨는 문제가 많아요. 툭하면 자리를 비우고, 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지 화단에 뭘 심고 뽑고 하더라고요. 그러는 새 아무나 다 아파트에 들어오잖아요.”
“자꾸 그러면 월급을 깎아야 해. 직장이 취미생활 하는 덴가. 하는 일이 많기나 하면. 아파트 관리비에서 인건비가 제일 크잖아요. 돈 받은 만큼 일을 해야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요. 잡상인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괜히 아이들한테는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그렇게 말하는 참석자의 아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이 옆에 있건 없건 사납게 발길질을 해대는 아이였다. 당신 아들은 잔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역시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여긴 민주주의 사회고, 우리는 저 사람의 고용주입니다. 우리 의견을 떳떳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해요.”
“아저씨한테 의견서를 전달해요. 오늘 우리가 작성합시다. 먼저, 저 크리스마스트리는 치우라고 해요. 그리고 근무 시간에 취미생활 하지 말라고.”
“주민한테 친절히 대하라는 것도 넣어요. 아이들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주차장 관리도 잘 하라고 하세요. 누가 새 차를 긁어 놓고 가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자긴 책임 못 진다고 발뺌이나 하잖아요.”
“잡상인 관리를 엄격히 할 것. 낯선 사람이 드나들게 내버려 둘 거면 우리가 왜 월급을 주냐고요.”
“아유, 좀 젊고 빠릿빠릿한 사람이면 좋을 텐데. 할아버지한테 맡겨 두려니 미덥지 않아서. 밥 먹을 때도 CCTV를 좀 보라고 하세요. 손바닥만한 TV 하나 갖다 놓고 노상 TV만 보더라고요.”
“그 TV를 치우라고 합시다. 근무시간에 TV 보는 직장이 어디 있어.”
나는 집에 아이가 혼자 있다는 핑계를 대고 회의에서 중도 퇴장했다. 의견서는 아마 정확히 전달된 것 같다. 도토리가 든 헌 양말과 천사 날개를 단 인형은 즉시 사라졌다. 내년엔 경비 아저씨가 화단에 꽃을 심는 모습도 아마 볼 수 없으리라. 추운 겨울 저녁, 경비실에 웅크리고 앉은 아저씨는 더 작아 보였다.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하지만 나는 이 말조차 마음속으로만 웅얼거렸다. 아마 나는 목소리를 잃어버렸나 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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