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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이나 철원은 덥고 춥기가 극과 극이다. 수은주가 가장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겨울엔 최저로 떨어지기도 한다. 가까운 데서 양평보다 더 추운 곳을 찾으라면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 방일리 일대 유명산(해발 864m) 자락이다.
동남쪽 양평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청평방향 서쪽 옥천면을 거쳐 중미산휴양림을 지나 유명산 계곡으로 가면 햇볕마저 들지 않아 겨울이 무척 길고 춥다. 한때 2년여 민가를 손보아 민박집을 운영하며 살아보니 추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루는 평일이라 손님이 없어 잠을 자던 중 소변이 마려워 일어나 방안 온도를 보니 영상 18도였다. 옷도 챙겨 입지 않고 속옷 바람으로 마당 꽃밭에 나가보니 영하 24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1분 사이에 42도 차이를 느껴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우연찮게 시작한 민박집엔 주말마다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사시사철 예약 손님이 새뜻한 주위 고급 민박을 찾지 않고 허름한 내 집, '향기 가득한 집-쳥산'에 놀러오자 동네 사람들은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민박집 이름 덕을 톡톡히 봤는데 가평전화국 안내원들이 한 번도 와보지 않고도 이름 몇 자 보고 무릉도원이나 되는 걸로 착각을 했는지 최우선으로 소개해줬다. 더불어 지인들이 내 소식을 물어 찾아왔고 한 번 오면 1년에 서너 번 다녀가기도 했다. PC통신으로 사귄 사람들도 한몫 단단히 했고 재미난 이야기로 밤새 떠들어줬으니 김규환이라는 사람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
가마솥 2개를 걸어놓고 주위에서 주워 놓은 마른나무를 때서 밥을 하고 누룽지까지 대령하였다. 사철 모닥불을 피워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왔다가는 날엔 호박이며 오이, 옥수수, 감자, 깻잎, 무와 배추 등 20여 가지 농작물을 맘대로 따갈 수 있게 했다. 산에서 직접 채취한 약재와 꽃잎, 열매로 쉰 가지 넘게 약술을 담가 시음할 기회도 줬다.
이런 곳에서 총각 혼자 음식을 해도 언제나 내 집에서 먹는 그 맛이 나도록 어릴 적 기억을 총동원하여 만들어 주면 손님들이 솥째 직접 들고 가서 먹는 시스템이었다. 친했던 후배들이 와서 돕기도 하지만 그것도 몇 번이었다. 취급했던 음식은 몇 가지로 한정했다.
20여 가지 약재를 넣고 직접 기른 '토종닭백숙 한 솥', 들깨와 통고추를 돌확에 갈아 국물내서 집 된장과 푸성귀를 듬뿍 넣고 끓인 '전라도식 보신탕과 흑염소탕' 같은 탕(湯)이 하나였다.
그리고 모닥불을 피워 맘껏 쬐고 불이 사르러들면 널찍한 돌 판을 올려 데웠다. 적당한 온도에 이르렀다 싶으면 엄지 손가락 두께로 특별 주문한 껍질까지 있는 오겹 삼겹살을 턱 올려 굵은 소금 팍팍 뿌려 구워줬던 '모닥불돌판삼겹살'과 진한 '된장찌개'도 메뉴판 한켠을 차지했다.
방학 때는 세미나를 하기 위해서 며칠간 유숙하는 대학 후배들도 심심찮게 왔으므로 뒷바라지를 하느라 평일도 바빴다. 생활도서관 옆에 있던 사회과학 동아리 한참 후배들이 왔을 때다. 웬만한 비나 눈발이 날려도 모닥불을 피워줬던 나였지만, 1월 중순 5일째 마지막 날에 접어든 후배들은 5시 반 해가 진 뒤로 토론을 지속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물었더니 삼겹살을 꼭 구워 먹겠단다. 온도는 맘껏 떨어지고 있었고 밤이 깊어갔다. 밤 9시가 넘어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혼자 누워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잠깐만, 안 끝내냐?"
"형 곧 끝나요."
"가능하면 날짜가 바뀌기 전에 하자. 내가 엄청 졸리거든."
"알았어요. 미안해요 형."
"날씨도 장난이 아니고 12시가 다 됐으니까 대충 마무리하고 얼른 밖으로 나와라."
"예."
7년에서 10년 차이가 더 나는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그냥 프라이팬에 구워 먹으라고 하기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먹는 삼겹살 제대로 된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마음을 짓눌렀지만, 쏟아지는 잠에 깜박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 몇 차례 채근을 하여도 나오지 않는다.
종용하기를 포기하고 자고 있는데 아이들이 내 방문을 뒤흔드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새벽 1시 20분이었다.
"왜?"
"형, 모닥불 좀 피워주세요."
"야아, 지금 몇 신데?"
"미안해요."
"알았어. 한 번 해보자."
바람은 더 거세지고 고기 굽는 자리가 산자락과 가까워 아이들에게 그냥 맡겨둘 수 없어 하릴없이 준비를 해주기로 했다. 분위기가 스산해 동네사람들이 다 자는데도 밖에 설치한 스피커에 '살타첼로' 음악을 잔잔하게 깔았더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눈발이 가늘게 흩뿌리고 있었다. 온도계는 영하 1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휴, 추워."
"야 거기서 떨지만 말고 저기 가서 장작 좀 더 가져와라."
쏘시개를 가져다가 불을 붙이니 이내 활활 잘 타오른다.
"야! 눈이 온다."
"우리 마지막 날을 축하하려나 보네?"
"이런 모닥불 쫴보기 참 오랜만이야."
"형은 이런 데서 사니까 좋겠어요."
'염병할 놈들. 지금이 몇 신데 지랄이야'라는 욕이 나오려는 것을 꾹꾹 눌러 삼켰다.
"야, 다들 들어가서 챙겨놓은 거 갖고 나와."
미리 준비한 쌈 거리와 양념된장, 돼지고기, 손수 담근 국화주 한 병을 가지고 나온다. 그 사이 나는 욕실에 말끔히 씻어놓은 돌판 두 장을 들고 나왔다. 이 돌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장(美裝)을 하는 친구가 남은 거라며 스무 장 인수하라 해서 쓸모가 있을지 몰라 집에 가져다가 고기 불판으로 거의 다 쓰고 이제 서너 장 가량 남아 있던 것이다.
"형, 이게 뭐예요?"
"고기를 여기다 굽는다. 지켜봐봐."
"선배님, 고기가 왜 이래요? 손바닥만큼 두꺼워서 익겠어요?"
"야 이놈들아 불이나 쬐고 있어. 심심하면 국화주나 한 잔씩 따라서 마셔라. 그 노오란 소국주(小菊酒) 한 잔 마시면 추위가 싹 물러갈 것이니까 조금 불이 줄어들 때까지만 기다리란 말이다."
돌 판을 연이어 붙였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옆으로만 빨갛게 퍼질 뿐 두 판 틈새로는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다. 행주로 한 번 더 닦고 물을 살짝 뿌려주자 올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지글지글 끓는다.
"고기!"
"여깄어요."
"차르르르 치이이~"
"소금!"
"여기요."
"야 이쪽으로 다 모여. 금방 익어버리니까 젓가락과 쌈 하나씩 쌀 준비해라. 술도 채우고."
판은 웬만한 밥상 넓이다. 소규모 양돈과 정육점을 같이 하는 물 좋은 사장님을 만난 덕에 삼겹살과 목삼겹 두 부위로 나눠진 고깃덩어리는 두 뼘 길이 그대로에 두께는 정확히 내 엄지손가락 굵기로 따로 주문한다. 이제껏 나보다 삼겹살을 크고 도톰하게 썰어간 사람은 없다고 하며 한 번에 스무 근 이상을 가져가니 직접 차로 배달해 주기도 했다.
목장갑을 끼고 하나씩 잽싸게 던지듯 올리자 달궈진 돌판은 삽시간에 기름을 쫙쫙 빼고 육수를 적당히 흘리며 움직이다가 꼬들꼬들 쪼그라든다. 가위도 필요 없다. 연마를 잘 해놓은 돌판 바닥엔 잘 눌지도 않기도 하지만 아무 거나 살짝 누르고 식칼로 쭉쭉 밀어주면 잘도 썰린다. 익으면 불이 덜 가는 곳에 밀어놓기를 반복한다.
타지도 식지도 않게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를 주워 먹느라 젓가락질을 해대는 모양이 흡사 닭이 모이를 쪼는 듯 불이난다. 불 옆에 갖다 놓은 된장찌개도 냄새를 풀풀 풍기며 끓고 있다.
"야, 맛있다."
"선배님 정말 맛있어요."
"이런 삼겹살은 처음 먹어 봐요."
"서울에서 먹었던 삼겹살과는 차원이 달라요."
"많이들 먹어."
집에 다녀간 사람들 평가는 한결 같았다. 이렇게 두껍게 구워서 쫄깃함과 고소함을 함께 맛볼 수 있는 행운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냥 먹힌다고 했다. 더 맛있기는 껍질 부위란다. 기름이 쭉 빠져 돼지고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고 한다. 여학생들도 한 번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기겁을 한다. 돼지고기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단다.
겨울이라 평소 산나물까지 뜯어 올린 쌈은 노란 배추 속과 상추 둘뿐이다. 한두 번 싸는 짧은 시간 상추는 땡땡 얼어 얼음이 배겨 상추라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촌놈들이 몇몇 섞여서인지 배추에도 잘 싸서 집된장 2:1 고추장 비율로 뜨고 마늘을 빻아 참기름과 함께 둘둘 섞어 비빈 양념된장을 찍어 먹는다.
"형, 신김치 없어요?"
"이참에 살림을 거덜내고 가라. 주방에 한 번 가봐. 포기째 하나 들고 와."
"술도 죽이는데요."
적당히 배가 찼을 법 한데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김치를 구워주자 날름 먹어치우는 통에 한 포기를 더 가져왔다. 어떤 독주(毒酒)로도 데워지지 않을 상황이지만 불 근처에서 술까지 몇 잔 곁들이니 몸에선 땀이 줄줄 흘렀다.
돌판의 위력은 대단하다. 서른 명까지 혼자 한 군데서 구워줘도 딸림이 없었지만 한창때인 후배 열두 명이 쉬지 않고 먹어대는데도 부족함이 없다. 한 번에 한 근 정도 올리다가 차차 양을 늘렸다. 먹는 속도를 보아 양을 조절하여 굽기를 40분. 고기가 이제 두 근이나 남았겠다.
대개 고기는 고온에 급히 구운 고기가 더 맛있고 영양도 만점이다. 높은 온도는 내부에 있는 진짜 영양소를 그대로 두고 겉에 있는 지방질만 일시에 빼서 스스로 굽는다. 돌판은 안성맞춤인 도구다. 숯불이나 프라이팬, 철판에 굽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숯불은 훈제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겉만 익거나 타기 십상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해진다. 속은 익지 않기도 한다. 프라이팬 등 얇은 쇠로 된 것은 열전도가 고루 되지 않고 기름기가 모여 흥건하고 식으면 기름을 먹는 습성이 있다.
1시간 2시간이 지났다. 소주도 20병이 비워졌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더 먹을 게 없었는지 12명이 13근(1근 600g)을 먹고도 나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이 집에 있는 고기까지 다 내놓으라는 건가? 끝내 물러서지 않자 오가피뿌리로 담근 술 2리터 한 병과 남은 고기 한 근 반을 서비스로 더 내주고서야 날이 환해질 때까지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 몇 곡조씩 뽑고 자리를 물렸다.
다음날 아침 냉이 된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내 생애 최고의 삼겹살을 찾은 쾌거였다. 벌써 7년 전의 일인데 나를 아는 사람은 삼겹살 한 번 먹게 해달라고 조른다.
지금도 나는 화강암 계단석 조각만 보면 삼겹살 한 번 구워볼까도 싶고 모닥불 피울 궁리로 바빠진다. 삼겹살 참 맛있지만 서울에서는 이런 맛이 나지 않아 먹어본 지 꽤 오래 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