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3년 5월 카이스트 풍동 실험실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 동안 학교와 피해자 유족은 피를 말리는 줄다리기 끝에 작년 1주기를 맞아 추모기념사업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추모식을 거행한 바 있다. 이 과정은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그 내용이 상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물적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유능한 인적 자원의 힘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일구어냈고, 앞으로도 이런 기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 나갈 것이 틀림없다. 특히 후기 산업사회의 특성상 과학 기술의 힘이 그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전국의 여러 실험실에서는 묵묵히 이런 과업에 종사하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과된 업무와 책임은 엄청난 반면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대우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이제 이공계 기피 현상이라는 위기에 대해서는 수 없이 많이 떠들었지만, 별 대책이 세워지지 않아서 오히려 시들해질 정도가 되었다. 장학금을 좀 늘리고 저리로 학자금을 융자해 준다고 해서 유능한 인재가 이공계로 오리라는 순진한 생각으로는 그 위기를 결코 해소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이공계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실험하는 공간인 실험실 안전에 관한 대책이 부족하여 그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재작년 사고 직후 여러 관련 단체에서 실험실 안전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고 상부에 건의하여 실험실 안전관리에 관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바로 처리될 것 같던 이 법안은 아직도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1월 5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 법률안은 연구 주체의 장에게 연구실험실 안전 환경을 확보할 책임을 부여하고 실험실 내 사고로 인한 연구 활동 종사자의 사망·상해에 대비해 의무적으로 보험에 가입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 상임위에 계류된 이 법안은 노동부와 교육부, 과기부 등 관련 부처 간 이견으로 세월만 보내고 있다.

연구실험실에서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것은 사후 사고 방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카이스트 사고의 경우 사고 직후 경찰의 수사가 이루어져 관련자 5명이 형사 입건되었고, 그 해 12월 전원 불구속 기소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공판 끝에 작년 10월 28일 최종변론과 함께 검사가 각 피의자에게 금고 1년 6월씩의 구형을 했고, 오늘(1월 13일) 대전지방법원 형사5단독 재판부는 각 피고인들에게 200만 원에서 500만 원씩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로써 사고 관련자에 대한 1심 재판 절차는 마무리되었으나 이 결과에 대해 피고인들이나 피해자 측 모두 흔쾌하게 수용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재판 과정에서 유족 대표는 법정 진술을 통해 비록 현행법상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는 하나 이런 사고의 핵심 책임은 바로 그 기관의 장이 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아직 우리나라에 유사한 재판 기록이 없어 그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이 재판이 판례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고도 강조하였다. 다만 그들이 실형을 받아 신분에 변동이 오는 것은 원치 않으나 그들의 법적 책임이 얼마인지는 꼭 기록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요청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업무상 일상적인 일들이 어느 순간 범죄 혐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으나 불행히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이번 경우처럼 미미한 하급 책임자만을 사법 처리하는 것은 사고 방지에 별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안전 관련 사고가 나면 그 기관의 장에게 감당키 어려운 법적 경제적 책임을 물을 때만이 사고는 줄어들 수 있다. 그래야 사무실의 큰 의자에 앉아 호령이나 하는 대신 관할 구역 곳곳을 수시로 점검하고 다닐 것이고, 또 사고가 안 나도록 직원들을 다그칠 것 아닌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과학 기술에 의지하여 미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노력한 만큼의 충분한 대우와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동시에 그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실험과 연구를 할 있도록 제도와 여건을 조성해 주는 일도 필요하다. 이는 그들 과학자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선 국회에서 낮잠 자고 있는 관련 법안이 하루 빨리 통과되기를 촉구한다.

덧붙이는 글 | 카이스트 사고와 관련해서 2003년 열 몇 건의 기사를 쓰다가 작년엔 1년 내내 아무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지난 해에는 사고 수습과 추모 문집 발간 등의 일에만 매달려 살았습니다. 이제 1심 재판 절차의 종결과 함께 쓰는 이 글이 사고 관련 마지막 글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관심을 갖고 격려와 위로를 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다른 주제의 좋은 글로 다시 인사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