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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령은 마물이었고, 공포의 대명사였다. 초혼령이 나타난지 벌써 사십여년이다. 그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기에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초혼령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초혼령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해금령이 공표된 지금까지도 초혼령의 공포는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시일 내에 치유될 일이 아니었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자로군.”
당일기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매달렸다. 동시에 뒷짐을 지고 있던 그의 양손이 풀렸다. 그건 위험하다는 신호였고, 그가 살의(殺意)를 품었음을 의미했다.
“말학 후배에게 굳이 가르침을 주시겠다면 피하지 않겠소.”
담천의는 말과 함께 당일기를 똑바로 주시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사다. 더구나 그의 말은 정면 도전이다. 그 말에 구양휘까지도 얼굴색이 변했다. 담천의의 무위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상대는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독혈군자 당일기다. 더구나 이런 협소한 곳에서 온몸이 독이라는 당일기를 상대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구양휘는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 망설였지만 지금까지 담천의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당일기는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의 인내는 비겁함을 의미한다. 설사 저놈이 초혼령주라 해도 당일기는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화를 내면 주위의 수백 명을 한순간에 독살시켜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인물이 당일기다.
“패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하지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패기는 만용이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소.”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하지만 담천의가 오만하다고 보일 정도로 맞서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이미 갈인규에 대해 형임을 자처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당문에서 갈인규에 대해 더 이상의 핍박을 하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서 위세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본래 후배에게 먼저 손을 쓰는 것은 관례에 어긋난 일이나 네놈 같이 건방진 자는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이니….”
말과 함께 당일기의 우수가 쫙 퍼지며 담천의의 어깨를 잡아왔다. 붉게 물든 그 손은 닿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녹인다는 독수(毒手)다. 더구나 다섯 손가락에서 퍼지는 실(絲) 같은 기류는 영롱한 빛을 발하며 담천의의 상체를 감아왔다.
스스---슷----
허나 담천의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당일기를 향해 다가들었다. 그것은 마치 공격해 오는 상대에게 몸을 맡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였으나 빠르게 휘저어가는 그의 쌍수는 기이하게도 당일기의 실 같은 기류를 차단하고 자신의 어깨를 잡아채는 당일기의 오른팔 관절을 노리며 올려치고 있었다.
“제법이군.”
당일기는 한손만으로도 가볍게 제압하려 했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급하게 왼팔을 들어 자신의 오른팔 관절을 노리고 들어오는 담천의의 손을 내려침과 동시에 그의 가슴을 잡아갔다.
파파---파팍---!
그들의 손속은 너무나 빨라 도대체 허공을 가르는 팔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터져 나오는 타격음은 오히려 낮고 둔탁한 것이어서 필생의 내력이 실린 것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공력을 전신에 갈무리하고 박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싸움은 검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었다. 주위가 좁아 신형을 날려 피할 수도 없었고, 몸에 의존해 막고 때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 한수만 삐끗해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담천의로서는 당일기의 독기로 인해 더욱 불리할 수도 있었다.
당일기의 쌍수가 연속적으로 가슴을 채가고 찌르자 담천의의 상체가 활처럼 휘었다. 그러자 중심을 잡고 있는 하체를 향하여 당일기의 발길질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담천의의 몸놀림이었다. 당일기의 위험하고도 정교한 공격을 마치 스치듯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담천의의 신형이 뒤집어 지며 예상치 못한 상체와 하체를 노리며 빠른 발공격이 이어졌다.
빠--빡---!
한 순간 십여 초의 손속을 나누었던 두 사람 간에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엉켜있던 신형이 갈라졌다. 그들의 모습은 기이하게도 손을 쓰기 전과 똑같아서 마치 손속을 나누지 않은 것 같았다. 단지 변한 것은 여기저기 누렇게 변색된 담천의의 옷이어서 당일기의 독기에 스친 것 같았다.
“큰소리 칠만큼 실력이 있군. 허나….”
당일기는 매서운 공세를 취했음에도 이번 손속에서 이득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기색으로 보아 담천의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 상대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당문의 비전은 박투술이 아니라 독과 암기다. 그래도 어쨌든 새카만 후배와 평수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때였다. 통천신복 구효기의 입에서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노제...! 이제 그만함이 어떤가?”
그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나직했으나 노기가 서려 있었다. 더구나 존칭을 생략한 반말이다. 마치 딴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당일기는 일순 당황했다. 구효기의 기세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것이 아니었다. 기이했지만 자신을 위축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구거사! 어찌….”
“노부는 지금 당노제가 물러서 준다면 노부에게 독을 쓴 일을 잊어버리겠네. 허나….”
그의 말은 명백했다. 그는 부탁과 함께 협박을 하고 있다. 구효기가 이렇듯 누구를 위해 나선 적은 없었다. 당일기는 통천신복 구효기와 담천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들 간에 어떤 교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구효기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다.
당일기는 담천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도 침중해 있었지만 자신을 보는 눈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만약 자신이 담천의에게 상처라도 입힌다면 이 중 누구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기세다. 특히 구양휘의 표정은 눈에 보일 정도로 굳어 있었다. 더구나 자신과 상대하는 자는 아직 검을 뽑지도 않았다. 풍운삼절을 상대할 때 검을 사용했다고 들었다.
당일기의 뇌리에는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지금 자신이 고집을 부린다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언정 이득은 없었다. 구양휘를 비롯하여 남궁가, 팽가, 모용가까지 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더구나 구효기가 정면으로 나선 이상 그의 세치 혀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구 거사께서 나서시는 이유가 타당하다면 소제는 물러가겠소.”
당일기는 다시 뒷짐을 지었다. 그 행동은 물러날 여지만 준다면 자신의 체면도 세우며 물러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이 자리에 굳이 찾아와 이런 번거로운 일까지 일으킨 것은 노부였네. 또한 노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만든 것은 당가였네. 그럼에도 계속 이 젊은이를 핍박한다면 노부에게 당가의 위세를 떨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
구효기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적이 되겠느냐 아니냐는 선택을 던진 것이다. 당일기는 좌중의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당혹스런 느낌을 가졌다. 너무 쉽게 생각했고, 조카들의 성급한 행동을 제지시키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거사께서는 지금 소제에게….”
“부탁하는 것 일세. 노부의 얼굴을 한번쯤 봐주는 것이 어떤가?”
위협이 아니라 부탁이라고 했다. 본래 당일기는 사려가 깊고 신중한 사람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아는 사람이다. 이 정도로 구효기가 물러날 여지를 준다면 물러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그는 담천의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규아의 의형이라니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앞으로 노부와 부닥치는 일이 없으면 좋겠군.”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하지만 담천의도 더 이상 시위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당일기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후배가 무례하게 굴었다면 사과드리겠소.”
그 말에 당일기는 고개를 끄떡이며 갈인규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후에 사천에 오게 되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네 아비야 어쩔 수 없지만 어찌 모자지간(母子之間)의 정을 끊겠느냐.”
하지만 갈인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갈인규는 의외로 고집이 있는 성격이었다. 그런 모습을 본 당일기는 탄식과 함께 구양휘 일행에 고개를 까딱하고는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기로 하자.”
그는 자신이 본래 앉자있던 탁자를 그냥 지나치며 그곳에 있는 당씨 형제들에게 말했다. 이미 망신을 당한 아이들이다. 이곳에 더 있으면 그들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사천 땅에서는 그런 것이 통할는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아니다.
더구나 갈인규 일행은 한눈에 봐서도 만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아니 만만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힘을 가진 인물들이다. 구양휘는 그렇다 하더라도 일행 중 말석을 차지하는 듯 보였던 젊은 승려. 자신의 조카들에게 손을 쓴 청년승의 무위는 소림의 비전절기를 그대로 익힌 모습이다.
당씨 형제들은 구양휘 일행 쪽을 바라보더니 당욱을 부축하며 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아직도 제대로 걷지를 못한 것으로 보아 담천의가 모질게 손을 쓴 모양이었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본 담천의는 자리에 앉으며 미안한 기색을 띠웠다.
“번거로운 일을 만들어 미안하오.”
그는 구양휘와 광도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말에 광도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담천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형제들 간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는 술병을 들어 불그레한 여아홍을 담천의의 잔에 따라 주었다. 실상 이 자리에서 미안한 사람은 갈인규였다.
(제 25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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