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는 제3자 개입금지법의 철폐를 한국에 권고했다. 지금은 없어진 법이다. 개혁을 부르짖는 시점에 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정상을 비정상으로 돌리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1심과 같은 판결을 재판부가 내린다면) 개혁이 아니라 개혁의 후퇴라고 할 수 있다. 악법의 망령을 다시 이끌어 내는 것은 재판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0년 전 대표적 노동탄압의 독소조항으로 비판받아온 '제3자 개입금지' 위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14일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에 앞서 기자들에게 밝힌 말이다.
권 의원은 이날 최후진술에서도 "이미 정부는 민주노총을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있을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 이렇게 (10년간) 법정에 서게 되고 지금까지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구했다.
이날 권 의원의 항소심 결심공판은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8부(재판장 주경진 부장판사) 심리로 1시간여동안 서울중앙지법 320호 법정에서 열렸다.
권 의원의 결심공판에는 사건 당시 노동부장관이었던 남재희 전 장관이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석해 지난 94년 6월 '철도파업' 당시 과정에 대해 진술했다.
남 전 장관은 "민주노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노대'(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결성을 장관으로 취임된 이후 노사분규 이후 보고 받았다"며 "당시 정부에서 인정했던 '철도노조'와 별도로 만들어진 '전국기관사협의회(이하 전기협)'도 분규가 나자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남 전 장관은 "비록 (전기협이) 법외의 노조이지만 노동부 장관으로서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화하겠다고 했다"며 "전노대 대표인 권영길 위원장은 (철도) 분규가 났을 때 장관실로 자주 찾아왔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증인 참석... '철도 파업' 당시 협상 불발 이유 놓고 논쟁
이날 재판에서 검찰측과 권 의원은 지난 94년 철도파업 당시 전국기관사협의회(전기협) 대표들이 정부측과의 협상에 불참한 정황 등을 둘러싸고 공방을 벌였다.
이 문제에 대해 남 전 장관은 "전기협 대표들이 (6월 22일) 저녁 8시에 (정부측과) 협상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협상이 불발됐고, 경찰이 투입됐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권 의원은 "저녁 8시에 협상테이블에 나가기로 했고, 그 다음 문제는 (전기협) 대표단에게 '사전영장'이 청구된 상태라서 '신변보호' 문제로 이야기가 오갔다, 만약 협상테이블에 나가면 (경찰에) 연행될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의견이 제기돼 노조사무실에서 협상을 하자고 중재하다가 시간이 흘렀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검찰측은 "전기협 내부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아닌가"라며 "결국 정부와의 협상주체 논란으로 남 전 장관이 진술한 것과 피고의 말이 반대되기 때문에 납득되지 않는다"고 추궁했다.
이에 권 의원은 "노조가 정부측 안(철도노조 산하로 협상테이블에 앉는 것)을 수용해서 협상하겠다고 했는데도 경찰을 투입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하자, 검찰측은 "비약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 전 장관의 증인 심문 후에 권 의원의 변호인인 이덕우 변호사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어렵게 민주노총을 만들었는데, (정부가) 이를 적극 저지하려는 의도가 이 사건의 핵심"이라며 "사실 1심 판결 직전에 악법조항이 없어졌으면 논리상으로 (검찰이) 고소를 취소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 변호사는 "10여년간 숱한 검사와 판사들이 이 사건을 거치면서 노고와 시간, 정력을 바쳐 유지한 것(공소사실)이 가치가 있었는가"라고 반문한 뒤 "피고나 민주노총 등이 받는 정신적 부담은 이루어 말할 수 없고, 무엇보다 흐르는 시대정신을 막을 수 없기에 재판부는 부디 냉철하고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권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을 오는 2월 16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20호 법정에서 진행한다고 밝혔다.
권 의원 "정부당국이 '악법' 폐지했다면 그 정신 살려야"
권 의원은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빠져 나오면서 "말로는 구악을 청산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 중의 하나가 저 권영길의 재판이라고 생각한다"며 "민주노총위원장을 법정에 세운 주된 이유는 정치적 판단에서 민노총 건설을 막아보겠다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억지로 다 법을 적용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권 의원은 "사법부와 정부가 당당했다면 일반교통법을 내세워서 민노총 위원장을 법정에 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또 '3자개입금지법'이 (이번 재판의) 주된 이유 중에 하나로 정부당국이 악법이라고 해서 폐지했다면 그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권 의원은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이던 지난 1994∼1995년 불법집회를 주도한 혐의(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으로 1995년 12월 구속기소됐다. 이후 2001년 1월 1심에서 검찰의 징역 3년 구형에 당시 재판부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이에 권 의원은 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