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 날 밤, 장판수는 윤계남과 함께 주막에 머물며 활과 칼에 대한 얘기를 더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다. 이진걸이나 안첨지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장판수에게 들었지만 혹시 찾아오더라도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고 도리어 따져 물을 작정이었다.

“아니 평안도에서 여기까지 갑사 취재를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인가?”

녹명서(각종 시험을 관리하는 곳)에서는 장판수가 서툰 글씨로 옮겨 적어 제출한 녹명(錄名 : 성명, 본관, 거주지와 부·조·증조·외조의 관직과 이름, 본관을 기록한 시험 전 제출 서류)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외조부까지도 전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 없었을 정도의 양인이었으니 천첩 출신의 서자도 많이 오는 갑사취재자체를 그 자리에서 볼 수 없다고 시험관이 말 할 수도 있었다.

다만 정 5품 관직인 이조좌랑의 추천서가 있으니 결격 사유가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시험관들은 잠시 머리를 맞대어 수군거리더니 일단 취재에 응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장판수는 새삼 홍명구의 호의에 감사함을 느꼈다. 홍명구가 아니었다면 녹명조차도 제출하지 못하고 문전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칼을 잘 쓴다고 되어있군. 말은 탈 줄 아는가?”
“탈줄 압네다.”

시험관은 말을 한 마리 내어주어 장판수에게 한 바퀴를 돌아보라 일렀다. 본래 기사(말을 타며 활을 쏘는 것)와 기창(말을 타며 창 등의 무기를 쓰는 것)이 취재의 시취과목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근래 들어서는 대다수 처음부터 이를 할 수 있는 자가 드물어 무과 시험이 아닌 갑사시험에는 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아예 말에 오르지도 못하여 탈락하는 자도 있었다. 장판수와 윤계남은 이를 가볍게 통과했다.

“다음은 철전이다. 활을 멀리 쏘아 보내야 하지.”

윤계남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장판수에게 일러주었다. 철전은 말 그대로 쇠로 된 화살촉에 시위도 묵직해서 웬만한 힘으로는 제대로 화살을 날려 보내기조차 어려웠다. 최소 200보 이상은 쏘아야 함에도 이에 못 미치는 사람이 많았는데, 윤계남과 장판수는 이를 거뜬히 넘어서 350보를 쏘아 시험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어 목전(나무로 된 화살촉을 쏘는 시험)도 훌륭히 쏘았고 바위덩이와 뜀박질로 힘을 측정하는 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시험관들은 한데 모여 무엇인가를 의논한 후 장판수와 윤계남에게 말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입격이긴 하나 당장은 녹을 받고 있을 자리가 없으니 돌아가 기다리도록 하라.”

시험관의 말에 장판수와 윤계남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으로 과장을 나섰다. 과장에서 얼마쯤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걷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평양에서 온 촌놈이 세상물정 모르고 제멋대로 나다니며 활을 좀 쏘는 모양인데 나와 겨루어 보지 않겠느냐?”

인상이 험상궂은 자가 시비조로 얘기하자 윤계남은 장판수의 옷깃을 잡으며 속삭였다.

“어르신께서 바로 이런 경우를 조심하라 일렀네. 속히 이곳을 피하세.”

윤계남과 장판수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길을 돌아서 가려하자 무뢰배들은 눈치를 채고서는 다자 꼬자 덤벼들기 시작했다.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둘은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그 방향으로도 두 어 명의 무뢰배들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취재에는 검술을 보지 않았지만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것이네.”

윤계남은 준비해둔 목검 두개를 짐에서 끌러내어 그 중 하나를 장판수에게 던져준 후 무뢰배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무뢰배들은 한차례씩 일격을 당하며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다른 무뢰배들이 주춤대며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자 장판수와 윤계남은 그 틈에 몸을 피해 도망쳤다.

“그 놈들이 딱히 우리가 입격했다고 노린 것이 아니라 판수 자네를 염두에 둔 것 같네만. 취재에 입격해 놓았으니 때를 기다리며 나와 함께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떤가?”

한양에서 달리 기댈 곳이 없었던 장판수는 윤계남의 말을 받아들였고, 우정으로 힘겨운 한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장판수' 편 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