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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깊고 긴 겨울밤에는 봄이 오면 집을 짓겠다는 결심으로 우리는 빈 종이에 설계도면을 그렸습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소박한 오두막집까지 많고 많은 집들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지어졌다가 부서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몸으로 하는 일보다 머리로 하는 일에 더 익숙한 우리의 한계는 여기에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항상 해를 넘겨왔었지요.
작년 뜨거운 여름 어느 날, 흙집을 짓겠다고 선언한 옆 동네에 사는 친구 오경숙은 우리와는 사뭇 성향이 달랐습니다.
“새로 지은 축사 옆에 관리사가 한 채 있어야 할 것 같아. 이왕이면 흙집으로 지어 볼까하는데 모아 놓은 자료들 좀 한번 보여줄래?”
그렇게 찾아 왔던 오경숙은 내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자료들을 쓰윽 한 번 훑어보더니 전원주택에 관한 잡지 한 권만 달랑 들고 갔습니다.
“흙집은 하지(夏至) 전에 지어야 하는 거래. 그것도 모르고 장마철에 일을 저질렀네. 오늘은 비가 와서 쉬기로 했다. 비 그치면 구경 와.”
그녀에게 이런 전화가 온 것은 우리 집에서 잡지책을 가져간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녀는 우리처럼 요원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득달같이 달려가 보니, 남편은 벽에 흙을 올리고 아내는 흙을 다져서 남편에게 넘겨주는 부부애가 담긴 아담한 흙집을 짓는 중이었습니다.
빌려간 잡지에 나오는 웅장한 황토집은 아니었지만 정말 우리가 꿈만 꾸던 흙으로 집을 짓고 있던 것입니다. 온 몸이 흙으로 범벅이 되어서도 철벅거리는 흙을 맨손으로 다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의 모습은 차라리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자기 손으로 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단을 쌓는 것같은 그녀의 모든 행위는 신성하게 보였습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선두를 빼앗긴 것 같은 조금은 서운한 심정으로 찾아갔던 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가슴에 전류가 흐르는 듯 했습니다. 알량한 지식을 앞세워 그동안 친구 앞에서 아는 체 해왔던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무 마리가 넘는 한우가 자라고 있는 축사로, 논과 밭으로, 바지런하게 다니면서도 먼지 한 톨 없이 집 안 살림까지 해내는 그녀 앞에서는 항상 작았는데 그녀가 흙집을 짓는 모습 앞에서는 몸이 녹아내릴 지경이었습니다.
친구 부부는 시골에서 낳고 자라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흙을 다루는 법과 시골 살이에 걸맞는 각종 장비와 몸으로 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에 꿈을 현실로 옮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거지요.
이젠 시골 사람이라고 자처할 만큼 시골 살이에 적응을 하고 있지만 우리 부부가 친구네를 따라 가는 일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는 일보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친구네의 흙집 짓는 일은 과감했던 시작에 비해서 진행 속도가 상당히 느렸습니다.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흙이 잘 마르지도 않은데다 장마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은 탓이지요.
거기에 친구의 남편이 일 때문에 전적으로 그네들의 집 짓는 일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벽채를 쌓아 놓고 두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지붕 재료를 놓고 고민하는데 한 달씩이나 걸렸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흙집을 짓는다고 동네 어른신들마다 구경을 와서 각각 한 마디씩 훈수를 놓는 바람에 헛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붕을 제대로 올리지도 못하고 축사를 짓고 남은 재료로 덮어 놓는 수준에 그쳐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 번씩 방바닥에 보일러를 설치했다는 등, 씽크대 맞추는 곳을 소개해 달라는 등의 전화로 그녀의 흙집 짓기의 진행 상황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도배를 하게 됐다. 근데 한지 도배지를 여기서는 구할 수가 없네. 어디서 사는지 아는데 없니?”
이런 전화가 온 날은 내내 따뜻했던 겨울 날씨가 갑자기 성을 내고 돌아서 한 낮에도 영하에서 놀던 날이었습니다.
내가 기절초풍했던 일은 친구가 포장지로 쓰는 한지를 사다가 직접 풀을 쑤어서 바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초배지까지 바른 상황에서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 스타일에도 상관 않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삼십대 후반에 벌써 허리 디스크에 시달린다는 그녀가 남편의 도움도 없이 척척 한지를 벽에 바르는 모습은 가히 초인적이었습니다. 직접 지은 흙집이라서 애착 때문에 그랬겠지만 나는 수시로 그녀가 사는 법에 감동을 받습니다.
친구네가 거의 반 년 씩이나 흙집을 짓느라 고생을 하는 동안 우리는 흙 한 삽 떠주지 못했습니다. 힘내라고 밥 한 번 사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친구 오경숙은 드디어 흙집으로 입주했으니 주말마다 새집 증후군 따위는 걱정 없는 자기네 집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골 살이를 지탱하는 힘은 오경숙처럼 본 받을 만한 친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