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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스스스----
천고의 기물인 오룡번이 가루로 변하며 바닥에 흘러 내렸다.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허무했다. 상상만으로 천하제일인의 권좌에 앉아 있다가 사라진 꿈이 이럴 것이다. 마지막 묻어 있는 가루마저 털어내듯 손을 툭툭 턴 독고좌는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큰 불상사 없이 이 일을 끝내게 해 주신 이 자리의 무림동도께 감사드리오. 잠시간 소란이 인 점 양해바라오.”
그 순간이었다.
“그 오룡번이 진품(眞品)임을 누가 알 수 있소?”
“그 오룡번이 진품(眞品)임을 누가 알 수 있소?”
두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나 마치 한사람이 이야기 하듯 똑같은 말이 장내를 울렸다.
“낭씨쌍살(狼氏雙煞)이군.”
나직한 모용수의 말에 담천의는 더욱 기이한 표정을 띠웠다. 관왕묘에서 흑모전서와 함께 보았던 자들이었다. 변장한 지광계 부부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 앉았던 그들까지 이곳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오룡번을 가진 지광계 부부는 왜 섭장천 일행과 헤어져서 이 장안루에 나타났으며, 그 자리에 있었던 낭씨쌍살은 무슨 이유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담천의의 뇌리에는 점점 풀 수 없는 의혹이 휘감아 돌고 있었다.
“혹시 철혈보에서는 가짜를 없애며 완벽하게 오룡번을 독차지하려는 것 아니오?”
“혹시 철혈보에서는 가짜를 없애며 완벽하게 오룡번을 독차지하려는 것 아니오?”
낭씨쌍살의 지적은 매우 날카로웠다. 사실 오룡번을 본 사람은 없다. 오룡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철혈보만이 알 수 있었다. 또한 낭씨형제의 말은 오룡번이 철혈보에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가짜를 내세워 지금 무림인들의 이목을 흐리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독고좌의 논리정연함에 오룡번을 포기하려던 좌중의 얼굴에 다시 탐욕의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히려 독고좌의 손에서 사라진 오룡번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위험이 닥쳤다 해도 천고의 보물을 자기 손으로 없앤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귀하들은 지금 본보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소?”
이미 오룡번은 가루로 되어 사라진 상태다. 진위 여부를 가릴 물건도 사라졌고, 있다 하더라도 명백하게 알아 낼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독고좌가 진품이었다 아무리 말한다 하더라도 믿어 줄 상황이 아니다.
그 상황을 깨달은 독고좌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금색기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낭씨형제는 화령문(火靈門)의 진남학(晋南鶴)과 같이 고슴도치가 되어 죽을 판이었다.
“그들의 의혹은 잘못된 것이 아니오. 만약 독고대주께서 낭씨형제를 죽인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낭씨형제의 말을 믿을 것이오.”
말을 한 사람은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해 육십대를 넘긴 듯한 마의(麻衣)의 노인이었다. 더구나 왼쪽 뺨에는 길게 검흔이 나 있어 보는 이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허나 그것보다 기이한 것은 탁자 밑으로 보여야 할 그의 양다리가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귀하는 뉘시오?”
독고좌는 마의노인이 지적한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노인의 말대로 낭씨쌍쌀을 죽인다면 이곳에 있는 인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삼백육십 방위를 모두 점하고 혈폭비가 있더라도 이곳에 있는 백여명의 인물들과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희생을 감수하고 이긴다 해도 나중에 닥쳐올 문제는 큰 것이었다.
“노부는 잔결방(殘缺邦)의 반송(潘頌)이오. 대주께서 하교할 말씀이라도 계시오?”
반송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결방은 호북성(湖北省) 당양(當陽)에 그 근거지를 튼 지 오년이 지난 터였다. 잔결방의 인물들은 한 결같이 팔이나 다리 등이 없는 불구들이어서 보통의 문파와는 달랐다. 이러한 방파는 무림인들의 곱지 못한 시선과 주목을 받는 게 보통이다. 허나 잔결방은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고 그들의 행사 역시 공명정대해 여느 방파와 다름이 없었다.
“반노선배이셨구려. 하면 본 대주가 어찌하면 믿겠소?”
독고좌로서는 일단 이 어려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할 시간을 얻어야 했다. 자칫 문제가 발생하면 철혈보는 오명과 더불어 무림인들의 공적이 될 수도 있다.
“휴--우-- 사실 노부로서도 뾰쪽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소? 다만 오룡번을 가지고 있었던 금적수사 부부를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 넘기신다면 대주가 없앤 오룡번의 진위와 상관없이 철혈보는 누명을 벗게 될 것 같소.”
반송의 말은 사실 합리적이라 할 수 있었다. 오룡번을 가졌던 사람이 지광계 부부였으니 그들을 좌중의 인물들에게 넘긴다면 오룡번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좌중의 인물들이 조사한다면 오룡번의 진위여부를 알 수 있고 독고좌가 없앤 오룡번이 가짜라면 진품의 오룡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철혈보가 무림인들에게 받을 오해의 여지도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철혈보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반송의 말대로 이곳의 인물들에게 금적수사 부부를 넘겨준다는 것은 그들에게 굴복하는 것이고, 철혈보의 명예는 진흙 속에 처박는 짓이다.
“금적수사 부부는 본보의 사람이고, 중죄인이오. 그들은 본보의 율법(律法)에 따라 치죄(治罪)할 것이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여기저기가 불만에 찬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흥, 그 말은 낭씨형제가 말한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군.”
“철혈보가 당금 무림에 최고의 방파이기는 하나 전 무림인을 적으로 만들 셈인가?”
“역시 속셈이 따로 있었어.”
상황이 급반전되고 있었다.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이쪽저쪽에서 일어서는 자들도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화르륵---슈---우----
헌데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실내 곳곳에서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며 매캐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연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장안루 전체에 퍼졌고, 한치 앞도 보지 못할 정도로 가득 차 눈을 뜨지 못하게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콜록!”
“허....헉..... 독연(毒煙)이다.”
“에--취----.”
좌중의 인물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기침소리와 재치기 소리가 들리며 움직임이 일었다. 소란이 점차 커지며 탁자와 의자가 부닥치는 소리가 들리며 좌중의 인물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철혈대는 창문을 열어라!”
그 와중에 독고좌의 엄격함이 배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그는 좌중을 향해 경고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움직인다면 혈폭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이미 자욱한 연기로 숨을 쉴 수조차 없는 좌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쇄애액-----!
움직임에 따라 소리가 들려오자 혈폭비가 날고 있었다.
“허--억--!”
“컥---무슨 짓이냐! 이제 이 안에 있는 모두를 죽일 셈이냐!”
고함과 비명이 교차되었다. 병장기를 꺼내들고 부닥치는 소리도 들렸다.
채---쟁--- 챙---!
독고좌는 암담했다. 일이 생각과 달리 갑작스레 악화되고 있었다. 평소에 냉철하고 빠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던 그라 할지라도 이 상황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결정을 해야 했다.
“혈폭비를 중지하라!”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이빨을 악물며 좌중을 향해 외쳤다.
“모두 움직임을 멈추시오!”
이번의 음성은 그의 진력이 실려 있는 목소리여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막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게 했다. 마치 머리를 둔기로 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이 효과를 보였는지 좌중의 움직임이 멎었다.
쏴아----- 쏴 ----
철혈대의 일부 인원이 열려진 창문 밖으로 부드러운 장풍을 이용해 몰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기를 배출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솜씨는 놀라워서 마치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듯 빠르게 장내의 연기를 배출시키고 있었다. 장내의 모습이 어슴프래 보이기 시작할 때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지광계가 사라졌다!”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은 지광계와 그의 아내가 있던 자리로 모아졌다. 헌데 없었다. 지광계와 그의 아내가 깜쪽같이 사라지고 텅 빈 의자 두개가 놓여 있었다.
(제 26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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