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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즘>의 표지 사진
ⓒ 교양인
한 권의 책을 진행하다 보면 처음 생각과 달리 읽을수록 단점만 점점 많이 보여 난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처음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편집에 들어가기 전에 써둔 간단한 감상문을 다시 읽으며 책의 장점을 떠올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하는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원제 ; Anatomy of Fascism)은 그와는 정반대로 읽을수록 장점이 더 많이 드러나는 드문 경우의 책이었다.

정치학이나 역사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고 친절하게 씌어졌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 중에서 이만큼 파시즘의 역사와 파시즘을 둘러싼 논란을 짜임새 있게 정리하고 분석한 책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상의 파시즘’부터 ‘대중 독재’ 논쟁에 이르기까지 ‘파시즘’이라는 말이 학계와 언론을 통해 유행어처럼 유포되는 우리 현실에서 <파시즘>이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파시즘>의 저자인 로버트 팩스턴(Robert O. Paxton, 1932~ )은 현재 컬럼비아대학에서 프랑스 역사와 20세기 역사, 파시즘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1970년대에 팩스턴은 <비시 프랑스>라는 책을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대사학자가 되었다.

당시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를 철저히 분석하여, 그때까지 파시즘의 희생양,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나라로만 인식되어온 프랑스가 나치에 광범위한 자발적 협력을 했음을 입증해 충격을 주었다. 비시 정권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파시즘 일반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파시즘>은 그가 40여 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를 담은 책이다.

20세기 정치의 최대 쟁점, 파시즘

파시즘은 20세기의 주요한 정치적 혁신인 동시에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에 밀어 넣은 고통의 근원이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연상시키는 ‘파시즘’, ‘파시스트’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적으로 정치적 논쟁의 중심 주제이며, 언론 매체에 수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이는 파시즘이라는 말에 합의된 학문적, 역사적 정의가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2004년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된 <파시즘>은 20세기 정치의 가장 큰 논란거리였던 파시즘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잠재울 결정적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시즘의 역사를 통해 파시즘의 실체를 밝힌다

이 책은 역사책이면서 동시에 파시즘에 관한 사회과학적 분석서이다. 저자 팩스턴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파시즘이 특정한 철학적 기반과 뚜렷한 이념적 목표를 지닌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강조한다. 실제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그때그때 정강과 목표를 수정하면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저자는 파시즘 운동의 시작부터 집권과 몰락까지를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과 히틀러의 뮌헨 폭동,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유대인 대학살 등 역사적 사건과, 파시즘 체제를 구성한 파시스트 지도자와 동맹세력, 일반 대중의 관계를 통해 파시즘의 특징과 성격을 밝히려 한다.

▲ 1937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석한 히틀러유겐트 단원들.
ⓒ 교양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열정적인 대중 운동'을 바탕으로 했을 때만 가능한 정치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집권 과정을 보면, 그들은 쿠데타 같은 무력행사를 통해 집권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선거에서 파시스트들에게 표를 준 수많은 일반 유권자들이 있었다. 팩스턴의 논지에 따르면, 파시즘을 열망했을지 모를 박정희 체제는 파시즘의 주요 요건인 열광적 대중운동과 대중동원이 없었다는 점에서 파시즘 체제가 아니다.

왜 지금 파시즘을 말하는가? - 파시즘 부활에 대한 경고

팩스턴은 21세기에 파시즘이 단순히 정치적 반대 세력에게 붙이는 기분 나쁜 수식어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정치 세력 또는 정권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팩스턴은 겉모습만으로 어떤 세력이 파시즘을 지향하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파시즘을 추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말끝마다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는 파시즘의 상투적 레토릭이나 철십자 따위 상징에 집착하기보다 파시즘 운동의 본질적 특성을 잘 알고 가려내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파시즘화 가능성을 경고한다.

미국은 결코 파시즘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 이후 테러리스트들에 맞선 애국적 전쟁이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시민의 자유는 크게 축소되었다. 미국식 파시즘이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은 유럽식 원본 파시즘과는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다. 미국 파시즘에는 스와스티카는 없어도 대신 성조기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있다. 또 파시스트식 경례는 없어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풀이하는 의식이 있다. 미국식 파시즘은 그러한 상징이나 의식을 내부의 적을 추려내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로 바꾸어버릴 것이다. - 7장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파시즘’에서

덧붙이는 글 | 이승희 기자는 <파시즘>을 출간한 교양인 출판사 편집장입니다.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 손명희, 최희영 옮김 / 교양인 펴냄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교양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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