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등산가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묻자 "거기 산이 있으므로 오른다"라고 했다던가. 내가 보기에 그 등산가는 달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피곤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함축성 있게 대답한 것이거나 하찮은 물음에 마지 못해 대꾸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는 얘기다.
요 며칠 동안 내 삶에는 후회가 많았다. 그 후회를 말끔히 내쫓아내고 내 삶에 낀 꾀죄죄한 때를 벗겨 내고자 오늘(19일) 나는 계룡산을 오른다.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면 곧장 오리(五里) 숲으로 접어든다. 저 나무들은 겨울이라는 삭막한 일상을 어떻게 견뎌낼까. 어쩌면 '견딘다'라는 말과 '속수무책'이란 말은 같은 혈통에서 태어난 말일지 모른다.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자 큰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꼬부라진다. 이 길로 가면 시누대 숲이 나온다.
지금의 갑사는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철당간 지주는 냇물 건너편에 있어 원래의 갑사가 지금의 대웅전이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개울 건너 대적전 근처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시누대 숲. 거기 한구석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동서로 맞서 있는 두 짝의 지주(支柱). 이 당간지주는 소박한 것일까 아니면 쓸쓸한 것일까. 마음 속에서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맞서 당간지주 하나를 만든다.
겨울 바람에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몇 백평 산자락에 빼곡히 들어찬 시누대들. 대나무는 왕대든 맹종죽이든 산죽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모두 다 집단적 살이를 한다. 바람이 잠자코 있으면 목소리를 낮추어 도란도란 속삭이고 바람이 불어오면 다같이 "쏴아 쏴아" 울면서 집단적 공명(共鳴)을 이룬다.
독백으로 가득찬 이 시대를 살면서 내가 늘 아쉬워했던 건 대숲에서 나는 소리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공명을 이루는 말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만길 허공 속으로 흩어지고마는 그런 언어가 아니라 계층과 계층이, 세대와 세대가 서로 공명을 이루는 언어를 그리워했다.
시누대 사잇길을 지나간다. 갑사 부도가 나오고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길손을 맞이한다. 원래 갑사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윗부분으로 올라갈수록 조각 기법이 약해지긴 했지만 기단 아래 받침돌에 새겨진 사자·구름·용의 형상이 힘차고 대담하게 느껴진다.
냇물을 건너 갑사로 향한다. 경내로 진입하기 전 우연히 바라본 감나무 한 그루. 늙은 감나무의 몸에서 산죽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아름다운 기생(寄生)이었다. 나도 더 나이 들면 저 감나무처럼 그렇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고기는 무장무애(無障無碍)와 자유자재의 상징이다. 물고기가 맑은 연못에서 거리낌 없이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일체의 걸림이 없는 무장무애한 상태를 말한다. 장자가 '어락(魚樂)'이라고 했던 바로 그 경지이다. 아마도 원천적 자유를 누리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또한 물고기는 수행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고기는 깨어 있거나 잠을 잘 때도 눈을 감는 법이 없으며 심지어 죽어서까지도 눈을 감지 않는다. 수행자도 물고기의 생태처럼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 부단히 도를 닦으라는 뜻일 것이다.
갑사에는 "뎅그랑"하고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어 게으른 수행자에게 경책(警責)을 주는 풍경(風磬)이 없다. 당연히 풍경에 추처럼 매달린 물고기 장식도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향적당(香積堂) 공포 앙서 부분의 물고기 조각이 풍경 대신 수행자들에게 경책을 내린다.
갑사를 뒤로 하고 싸락눈보다 조금 두껍게 눈이 깔린 산길을 올라간다. 벌써 누군가가 비질해 놓은 듯 사람이 지나기 좋을 만큼만 돌 위에 쌓인 눈들이 깨끗히 쓸어져 있다.
누가 비질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실용주의적인 사람일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눈이란 통행을 방해하는 매우 거추장스런 물질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의 오래된 지병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이윽고 얼음으로 뒤덮인 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는 지금 액체에서 고체로 물리적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폭포는 자신의 본질을 잃어 버린 것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본질을 지킨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자아를 잃지 않고 산다는다는 것은 얼마나 명예스런 일인가.
다시 산길을 오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천진보탑이 있는 신흥암에 닿을 것이다. 천진보탑은 인공으로 만든 탑이 아니라 탑 모양을 한 바위인데 거기에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올라가는 길섶에 산죽들이 눈을 뒤집어 쓴 채 겨울 한철을 노숙하고 있다. 사람도 저렇게 아름다운 노숙이 가능할까.
금잔디고개(638m)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선가 "딱따악 딱딱딱닥"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 나무들을 훑어 나갔다. 마침내 오색딱다구리란 놈이 나무에다 구멍을 파려고 쪼아대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부단히 쪼아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놈이다. 그 반복성, 그 무의미성. 한순간 딱다구리의 생태에서 나를 발견한다. 내 일상과 저 오색딱다구리의 일상은 결코 다르지 않다. 모든 일상은 덧없음이 본질이다. 그 속에선 어떤 깨달음도 나를 구제해 주지 못한다. 이것은 절망인가, 자기 연민인가.
人生在塵蒙 티끌 속의 인생
恰似盆中蟲 그릇 속의 벌레 같구나
終日行遙遙 하루종일 돌아다니지만
不離其盆中 그릇을 떠날 수 없구나
神仙不可得 신선은 될 수 없고
煩惱計無窮 번뇌만 가득 차네
歲月如流水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須臾作老翁 어느덧 늙은이 되었구나
- 김달진 역 < 寒山詩 > 중에서
금잔디 고개를 지나쳐서 삼불봉 고개에 올라선다. 여기서부턴 내리막 길이 기다리고 있다. 300여m쯤 내려가자 일명 남매탑이라 부르는 청량사지 쌍탑이 나온다.
한 스님이 위기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 호랑이가 보은의 뜻으로 속세의 한 처녀를 그 스님에게 물고 왔다. 그러나 그 에로스는 끝내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다. 스님과 처녀는 남매의 연분을 맺어 불도(佛道)를 행하며 평생을 마치고 마는 것이다.
이 설화는 일종의 경전이다. 남녀간의 에로스를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부처되기도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착'이란 어떠한 관계 또는 사물이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사전은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피부나 막(膜) 등이 염증으로 말미암아 들러붙는 일'이라고 또 다른 정의를 내린다.
아랫목, 따스함. 사람들은 아랫목에서 노곤노곤 허리를 지진다. 온몸을 뒤척이면서 "앗! 뜨거!"를 연발하지만 정작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은 드물다. 싱싱했던 달걀이 곯은 것은 보관에 필요한 적정 온도를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던가.
한(寒). 차가움은 물질과 물질의 유착을 단절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해 부패를 억제한다. 썩지 않게, 곯지 않게 관계를 조절한다.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적정 온도를 유지할 것.
바위 모서리에 길고 큰 고드름이 달려 있다. 유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바위가 피워낸 꽃이다.
내가 처음 동학사를 찾은 것은 삼십년도 더 너머 세월이 흘러버린 고등학교 1학년 때 겨울 방학이었다. 친구와 함께 절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8시가 지나 있었다. 해는 떨어지고 인적도 끊긴 절간은 적요로웠다. 우린 그 고요을 깨트리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걸어서 대웅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 열린 문틈으로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았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학인 승려가 부처님께 공양 올려진 과일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사과 한 개를 집어들더니 텅 빈 허공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이 사과는 내가 먹고" 이번에는 배 한 개를 집어들더니 "이 배는 부처님 먹고"하더니 도발적으로 까르르 웃어대더니 사과를 한입 쓱 베어 무는 것이 아닌가.
절집을 돌아나오면서 친구와 나는 한참 동안 낄낄거렸다. 아무리 엄격한 수행자라 할지라도 사람살이의 내용에 있어선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은밀한 즐거움이 우리를 즐겁게 했던 것이다.
겨울산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낸다. 그리고 그 비워낸 여백에다 바람 소리를 키우고 순백의 눈을 채워 넣는다. 그 여백을 바라보는 것은 눈(眼)이지만 받아들이는 건 마음이다.
겨울산이 보여 주는 여백은 아름답다. 우리네 삶에도 그렇게 여백이 있었으면 좋겠다. 숨통, 그 여백 그 작은 틈에서 사유(思惟)라는 가지가 뻗어나와 우리의 휘청거리는 정신을 다시 꼿꼿하게 일으켜 세운다. 겨울 산행의 참맛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 '곧은 소리는/곧은 소리를 부른다." _김수영의 詩 <폭포>의 한 귀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