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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의 <다보탑을 줍다>
유안진의 <다보탑을 줍다> ⓒ 창비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 <비 가는 소리>(10쪽) 중에서


유안진 시인의 시집 <다보탑을 줍다>를 펴들고 나니 나도 모르게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는 자의적인 틀에 가두었는지도 모른 채 무심히 세월은 흘러왔다. 왜 우리들의 어머니에겐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없었겠는가.

이제 예순을 넘어선 유안진 시인은 '참된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올랐다.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도 아닌데 시인이 나선 그 여행길은 낯설기만 하다. '나'의 밖에 존재하는 유혹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멀어져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 그곳에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철학적이거나 난해한 진리가 아닌 소박한 삶이다. <물오징어를 다듬다가>(p.14-15)라는 시에서 그는 물오징어를 두곤 '남은 옷 한가지 탐낸 적 없이 맨몸으로 살아왔던 너의 추위 너의 서러움을 나도 안다'고 말한다.

이 땅의 어머니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 시어들에 시인의 소박한 성찰이 담겨있다. 일상에서 읽은 시인의 삶은 '먹장가슴'이다. 시인은 그 '먹장가슴'을 딛고 일어서 그 가슴을 치유하고자 한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 <내가 가장 아프단다>(18쪽) 중에서


'왜 삶은 먹장가슴일까'라는 자신의 질문에 시인은 '나'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 크고 너무 무거'운 희망은 희망을 넘어서 욕망이 되고 그것은 집착이 되었던 것이다. 그 집착이 늘상 그 자신을 피멍들게 했고 배반했고, 그래서 아프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인은 <희망을 줄여서 불행감도 줄이자>라고 말한다. 그 희망을 줄이는 것은 그에게 '과적이고 과부하량'인 그의 욕망과 집착을 덜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희망'이라는 미명하에 만들어낸 짐을 덜어내고 '나'를 찾게 된다. 그가 덜어내는 짐의 무게에 비례하여 '나'의 자유와 평화는 더 커진다.

그가 찾아낸 '참된 나'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출발에서 이미 '참된 나'의 모습 역시 소박한 것에서 멀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런데 시인은 <나는 본래 없었다>라고 단언한다.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에서 나는 없단 말인가.

나 직전의 난자와 정자도 내 것이 아니었단다
나는 본래부터 없었단다
정면으로 정색하고 보니
한 뭉치의 유전자들이
떨떠름한 표정하고 곁눈질로 꼴쳐볼 뿐
거울 속엔 분명 내가 없었다

- <나는 본래 없었다>(50-51쪽) 중에서


시인은 '나는 본래부터 없었단다'라고 말한다. 또 '내가 없어져야 내 마음이 편하다면 남들이야 오죽하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무엇이 '희망'의 짐을 덜어내어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게 만드는가.

'나는 본래부터 없었단다'라는 말은 결코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나'의 모습이 일상에서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 일상 속에서 그는 '참된 나'와 온전하게 만나게 된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이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 <다보탑을 줍다>(11쪽) 전문


10원짜리 동전에서 시인은 그의 참된 모습을 찾는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그가 찾은 삶은 '쓸모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다. 그러나 그 '참된 나'의 모습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채 발견하지 못한 '내 안에 있는 진리'인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졌고 땅속에서 솟아난 것 같은 시를 쓰고 싶었는데(…), 유일무이(唯一無二) 한 것이 담긴 유일무이한 그릇이기를 편편마다 완전 독립적인 시를 바랐는데(…), 재미와 갈등 해소, 낯섦과 새로움으로 재탄생하는 시를 바랐는데(…), 온갖 실험을 다 해보고 싶었는데(…), 새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이기를 바라면서(…).

<다보탑을 줍다>라는 열두번째 시집을 통해 시인은 이제 한 번의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을 마친 것이다. 그러나 그 여행은 이제 긴 여행의 출발점인 듯하다. 그는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을 통해 새것에 목마르다고 말한다. 어쩌면 길고 지루할지도 모를 그 여행의 출발점에 올라선 그에게 위로와 축복의 말을 건네고 싶다.

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지음, 창비(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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