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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산 도중에 순간적으로 정상이 모습을 보였다.
정상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산 도중에 순간적으로 정상이 모습을 보였다. ⓒ 정헌종
포항에서 자가용으로, 다시 대구에서 비행기로 갈아 탄 우리 일행은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제주도에 도착했다. 술자리에서 제주에 가 보자는 제안으로 시작된 이번 거사는 돌발적인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왕 맘 먹고 나선 길 제주를 맘껏 즐기고 오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제주에 도착하니 회색 구름이 온통 섬을 감싼 채 한라산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사오십분 간격으로 있다는 어리목행 버스에 운 좋게 올라타긴 했지만 등산객이 많아 빽빽한 손님 틈에 끼어 불편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들판을 가로 지르니 눈들이 날리기 시작했고 제설이 채 되지 않은 한라 어리목으로 가는 길목에는 제주 경찰이 차량을 통제 하고 있었다.

환상의 눈꽃 향연과 변화무쌍한 구름의 축제

지난 번에 내린 폭설에 제설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눈이 오는 바람에 일반 차량은 통행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해발 900고지에서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어리목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어리목 매표소까지는 걸어서 20여분 거리였지만 양 옆으로 화려하게 핀 눈꽃의 장관은 탄성을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름다운 눈꽃 터널은 마치 환상 속을 걷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아름다운 눈꽃 터널은 마치 환상 속을 걷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 정헌종
날씨는 여전히 안개를 동반한 채 차갑게 침묵하고 있었다. 시야가 30m밖에 되지 않았기에 길 양 옆으로 환상적으로 늘어선 눈꽃과 등산로 가득한 안개는 마치 하얀 구름 터널을 연상시켰다.

습기가 많은 눈은 등산화 바닥에 더덕더덕 붙어 산행을 곤란하게 했다. 등산로는 등반객들에 의해 알맞게 다져져 있었지만 그 등산로를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허벅지까지 빠져 들었다.

사람들이 칭송했다는 오백년된 참나무의 굵은 가지와 사이로 보이는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사람들이 칭송했다는 오백년된 참나무의 굵은 가지와 사이로 보이는 구름 한점 없는 하늘 ⓒ 정헌종
어리목에서 시작된 등산로 초입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였다. 근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던 하늘은 등산을 시작하고 1시간 가량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흰 눈에 반사되고 맑게 갠 하늘에 뿌려지는 햇살은 한폭의 그림이 아니라 초대형 화면에 비치는 아름다운 자연의 생생한 다큐멘타리였다.

간단한 요기를 할 겸 우리는 송덕수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 나무는 조선 정조 18년(1794) 갑인 흉년에 나라에 흉년이 들고 사람들이 수없이 굶어 죽자 한 양반집의 계집종이 주인집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의해 산에 올랐다가 도투리를 구해 은혜를 입은 나무라 하여 사람들이 칭송하고 감사하여 제사로 모셨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만큼이나 눈에 쌓여 있는 송덕수의 모습은 신비함 자태 그대로였다.

산은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말을 한다.
산은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말을 한다. ⓒ 정헌종
땀이 식기 시작하자 지체할 시간 없이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잠시 눈에 쌓여 모습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주목의 화려한 맵시에 감탄하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하산하던 아줌마 한분이 조금 더 올라가면 이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설경이 보인다며 좋은 산행이 되라고 말한다.

능선에 가까워지자 바람 한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고목 사이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큰 눈이 올 것이라던 일기 예보는 완전히 빗나갔다. 간혹 안개가 순간적으로 차고 흩어지긴 했지만 하늘은 대체적으로 포근하고 아름다운 햇살을 보여줬다.

한라산의 신비와 아름다움
한라산의 신비와 아름다움 ⓒ 정헌종
가까스로 능선에 올라선 우리 일행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방 가득한 눈 덮힌 나무들의 신비스런 자태와 에메랄드 빛 하늘에 반짝이는 백색의 설원 평원이 끝없이 펼쳐 있었기 때문이다. 한라산 정상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붉은 깃발을 따라 등반객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띄엄띄엄 오르는 모습은 사진처럼 청명한 하늘에 그대로 인화될 듯이 보였다.

설원에 누워 산 아래 운해에 그대로 취하다

어리목에서 2.4km에 위치한 사제비 동산에 올라섰다. 사방이 훤히 보이는 사제비 동산의 설원에 배낭을 내려 놓았다. 날은 따뜻하고 바람은 봄날처럼 부드러웠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2홉 소주병을 꺼내고 육포와 간식 거리를 눈 밭 위에 풀어 해쳤다. 오던 길을 앞으로 하여 오른쪽은 운해가 장관이요, 왼쪽은 설산이 가득했다. 우리 일행은 소줏잔을 채우고 이런 아름다운 날씨와 경관을 선사한 한라산을 향해 건배를 외쳤다.

산 아래 짙은 운해를 보면 마음이 울렁이는 것 같다.
산 아래 짙은 운해를 보면 마음이 울렁이는 것 같다. ⓒ 정헌종
적당히 취기가 오르고 몸이 차가워지자 우리는 만세 동산을 지나쳤고 얼마 되지 않아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정상까지 입산을 통제되고 있었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도 전혀 럿셀이 되어 있지 않아 사실상 정상으로 향한 산행은 불가능하였다.

윗세오름의 날씨는 안개가 몰려왔다 다시 개였다를 무심하게 반복할 뿐, 삼백여명의 등산객들은 대피소 주변에서 설경을 감사하며 평화로운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천오백원하는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 한 우리는 하산길로 택한 영실을 향해 바삐 발 길을 돌렸다.

바위와 눈 그리고 스치는 바람. 병풍바위
바위와 눈 그리고 스치는 바람. 병풍바위 ⓒ 정헌종
윗세오름의 능선을 돌아 영실로 내려오는 등산로 구석 구석에 서있는 주목들은 한결 같이 눈을 뒤집어 쓰고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내린 눈 위에 바람이 불어 눈이 굳어지고 다시 그 위에 눈이 쌓이길 얼마나 해야 저토록 두텁게 눈 옷을 입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주목의 눈 옷들은 정상을 지키는 겨울의 병사가 걸친 두꺼운 갑옷처럼 보였다. 주목이 둘러 입은 갑옷은 엄중하고 화려한 것이었다. 우리는 한라산의 정상을 지키며 바라보고 서 있는 주목 병사의 아름다운 눈 갑옷을 스치면서 하산을 서두르고 있었다.

오백나한 능선의 기암 바위. 장군의 모습인가?
오백나한 능선의 기암 바위. 장군의 모습인가? ⓒ 정헌종
얼마를 내려 왔을까? 무심히 돌아 온 길은 돌아보니 뒤로 정상이 보였다. 정상을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손에 잡힐 듯이 너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여전히 산 아래는 운해가 넘실대고 있고 쓰나미를 닮은 운해는 한라산을 하나의 섬으로 만들고 있었다.

산은 너무 아름답고 나는 너무 평범하다.
산은 너무 아름답고 나는 너무 평범하다. ⓒ 정헌종
영실로 내려오는 등산 코스는 가파르다. 그러나 경치는 그야말로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의 능선 바위는 직접 보지 않고는 그 빼어남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얕게 반짝이는 눈과 흑갈색 기암이 어우러진 흑갈색과 백색의 완벽한 조화.

백색의 한라산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백색의 한라산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 정헌종
저기 산 아래 보이는 마을들의 한가한 모습들. 구름이 넘고 쉬었다 반복하는 백색 능선. 하산의 길은 미끄러웠다. 엉덩방아를 두번 찧고서야 영실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산 아래는 평온하고 인적이 없었다. 이렇게 산행을 모두 마쳤다. 짧은 산행이었지만 많은 곳을 보고 가장 많이 감탄한 한라산. 저 산 위엔 또 다시 눈이 오고 있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제주에서의 하룻밤과 제주 최고의 특산물 다금바리회와 제주도 관광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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