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람들로 넘쳐나는 대전 역전시장
사람들로 넘쳐나는 대전 역전시장 ⓒ 안병기
대전에서 가장 큰 재래 시장은 중앙시장이다. 그러나 가장 활기에 넘치는 재래시장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이곳 '역전시장' 따라 올 시장이 없다.

역전시장은 일종의 도깨비 시장이다. 근처 은행이나 관공서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면 각종 노점상들이 자리를 편다. 장사꾼들은 무나 배추를 실은 차량을 길가에 세워둔 채로 풋잠을 자기도 하고 아줌마들 가운데는 그냥 노점에서 담요 하나 달랑 둘러 쓴 채 꾸벅꾸벅 졸며 밤을 샌다.

새벽 4시가 되면 역전시장은 잠을 깬다. 사람들이 하나둘 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깡통에다 피워 놓은 불을 쬐려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아침 7시가 지나면 촌에서 첫차로 나온 할머니들도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장사 채비를 서두른다. 나물 몇 숨, 무 몇 개, 배추 몇 포기가 전부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큰길 하나 건너에 있는 중앙시장보다 역전시장이 각광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값이 싸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새벽시장에 나가보면 다른 시장과 비교해서 가격의 높낮이가 더욱 확실해진다.

"아줌마, 계산은 하고 가셔야지유"
"아줌마, 계산은 하고 가셔야지유" ⓒ 안병기
지난 6일 일요일 역전시장. 큰 길가에서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역전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약국들이 늘어서 있다. 이 약국들은 드링크제나 처방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일반 의약품들을 촌 양반들을 상대로 박리다매를 한다.

약국 옆에 자리를 튼 과일 가게는 평상시에는 나이 드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본다. 오늘은 손녀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앉아서 손님들을 살핀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다툼의 원인 중에는 계산 싸움이 제일 많을 것이다. 손님은 주었다 하고, 주인은 안 받았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행여 이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아이의 존재는 상당히 유용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월매나 많은지 잘못하다간 육포 되것네"
"사람들이 월매나 많은지 잘못하다간 육포 되것네" ⓒ 안병기
정육점에도 송곳 한 자루 꽂을 여지 없이 사람들이 늘어 서 있다. 산적과 꼬치 만들 고기를 사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이 시장에는 정육점들이 한 집 건너 한 집 식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가격 경쟁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다.

"내가 시방 너무 싸게 판 거 아닌지 몰러."
"내가 시방 너무 싸게 판 거 아닌지 몰러." ⓒ 안병기
생선 파는 아줌마가 껍질 벗기고 깨끗이 다듬은 홍어를 봉지에 집어 넣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째 표정이 뚱하다. 장사가 밑진다는 말은 말짱한 거짓말이라더니 혹시 밑지고 판 건가? 명절 대목장에선 파는 사람 마음도 푸지고 사는 사람 마음도 푸지다. 가격을 두고 밀고 당기는 실랑이도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 집서 떡 빼간 양반들 가래떡마냥 오래 사셔유"
"우리 집서 떡 빼간 양반들 가래떡마냥 오래 사셔유" ⓒ 안병기
차례상에 생선 한가지 덜 올려 놓고 과일 한접시 덜 올려 놔도 되지만 설날이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은 바로 떡국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에 놓고 메로 쳐서 덩어리로 만들어 손으로 주물럭거려서 가래떡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떡방앗간에 맡겨 버린다.

가래떡 빼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이 없으면 떡이 이쁘게 뽑아지질 않는 것이다. 가래떡을 뺄 때 밀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떡이 무르고 적게 들어가면 가래떡이 지나치게 딱딱해진다.

설날에 가래떡으로 만든 떡국을 먹는 이유는 병에 걸리지 말고 긴 가래떡처럼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이라 한다. 삶은 그것을 해석하는 자의 몫이 아니던가.

"명절에는 동태포전이 빠지면 안 되지유 "
"명절에는 동태포전이 빠지면 안 되지유 " ⓒ 안병기
생선 가게 아줌마가 동태포를 뜨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 동태가 비싸다. 5000원짜리 동태라 해야 포를 떠 놓고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값이 비싸서 생략하고 싶지만 그래도 남정네들 술 안주로는 동태포전만한 것이 드물다. 동태포를 사려고 서 있는 저 아줌마는 지금 '울며 겨자 먹기'를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홍어찜도 차례상에 올리면 좋치라우"
"홍어찜도 차례상에 올리면 좋치라우" ⓒ 안병기
홍어를 손질하는 아줌마의 손길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만일 도마 위에서 하는 예술 경연이 있다면 입상은 따논 당상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아줌마의 예술의 재료가 되고 있는 저 홍어는 포클랜드산 홍어일 것이다.

신토불이란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입맛의 관습 헌법'을 변경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적에 먹어 봤던 국산 홍어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는 나는 아직 내 입맛의 관습 헌법을 변경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들지 않는다. 온통 수입 농산물 투성이인 차례상을 받으시는 조상님들의 표정이 어떠실지 궁금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남자 손이 큰 법이지유, 맞지유?
아무래도 남자 손이 큰 법이지유, 맞지유? ⓒ 안병기
역전 시장 삼거리에 콩나물과 고사리, 도라지 등을 파는 노점이 있다. 오늘 숙주 나물을 듬뿍 퍼주고 있는 저 아저씨는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다. 보아 하니 직장에 다니는 아줌마의 남편이 맘 먹고 도와 주러 나온 모양이다.

나물 종류는 양에 민감하다.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남고 안 남고 차이가 크게 난다. 새삼스럽게 콩나물 장사 아줌마의 수지타산이 걱정되는 순간이다.

"두부라고  빼놓으면 섭하지유, 안 그려유?"
"두부라고 빼놓으면 섭하지유, 안 그려유?" ⓒ 안병기
명절이라고 해서 두부 못 팔소냐. 두부 사다가 기름에 묻혀 노릇노릇 지져서 차례상에 올리면 전 한가지는 해결되는 셈이 아니던가. 두부를 파는 아줌마의 기세가 제법 맹렬하다. 내 이 두부 한판 못 팔면 절대 우리집 문지방을 넘지 않으리라.

대전 역 광장. 명절에도 소외는 계속된다.
대전 역 광장. 명절에도 소외는 계속된다. ⓒ 안병기
역전시장을 빠져 나오면 거기 바로 대전역이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오늘도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떠나지만 역전 광장 노인들은 쉬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명절이랍시고 마당히 갈 곳도 없고 찾아 올 사람도 거의 없는 쓸쓸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느끼는 소외의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할 것이다.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닌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전문


설날은 농경 사회의 추억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설날이란 시인의 시만큼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절이 없다면, 가족끼리 이마를 맞닿고 오손도손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날이 없다면 생은 얼마나 팍팍할 것인가.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라는 시인의 그리움에 잠긴 목소리가 마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그런 오후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