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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시럴...... 가이삿기 내몰리듯 지 집에서 쫓겨난 것도 왕이라고 극진히 맞아 들이네”

성벽사이로 왕의 어가를 내려다보며 욕 짓거리를 내뱉는 장판수를 보며 다른 병사들은 질겁하며 쉬쉬거렸다.

“갑사님, 어가를 내려다보는 것도 살 떨리는 판국에 그런 소리했다가 높으신 양반네들이 들으면 어쩔라고 그럽니까?”

“들을 테면 들으라지! 못 마땅하면 내 목을 치든지 마음대로 하라 그러라우! 그리고 저 꼬라지를 보고 곡소리 내는 놈들은 또 뭐야! 퉤이!”

장판수의 말처럼 성안 전체는 곡소리로 가득히 차 있었다. 장판수는 다른 병사들이 보라는 듯 귀를 틀어막으며 성벽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장판수는 이젠 지긋지긋 해진 남한산성의 성곽을 보며 팔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갑사취재에 입격한 후에도 장판수와 윤계남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양거리를 떠돌며 생계를 위해 몸 품을 팔아야만 했다. 어찌된 셈인지 그보다 못한 실력으로 입격한 자들은 한양의 오군영에 소속되어 갑사행세를 하고 있음에도 장판수와 윤계남에게 아무런 직분도 내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적어도 윤계남은 홍명구에게 부탁해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분에게 또다시 신세를 질 수는 없지 않은가.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상당한 빚을 진 셈이니 이젠 힘으로 한번 이루어보고 싶네.”

장판수와 윤계남은 틈이 나면 검술을 연마하며 기량을 키워 나갔다. 검술을 천시하고 활을 중요시 여기는 조선의 풍토에서 검술에 관심이 있는 자들끼리 뜻을 맞추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둘의 신의는 날로 두터워졌다.

“난 말일세. 훈련도감에서 병사들에게 검술을 조련시키는 것이 꿈일세.”

항상 윤계남이 하는 말에 장판수는 웃으며 답했다.

“니래 이제 그만 고집피우고 홍대감에게 부탁해 보라우. 내래 평치(평안도 출신의 속된 말)라서 기렇게 된 것이디......”

그럴 때 마다 윤계남은 펄쩍 뛰며 장판수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소리인가! 실력을 쌓다보면 언젠가 우리를 알아줄 곳이 있을 걸세. 그까짓 고향이 무슨 상관인가?”

사실 장판수는 몸 품을 팔러 나가도 말투로 인해 평치라고 무시를 당하기 일쑤라서 한 소리였지만 편견과 차별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어느 날, 장판수와 윤계남이 아침 일찍 부터 일을 나섰을 때 그만 홍명구와 마주치고 말았다. 홍명구는 일꾼 복색의 그들을 보며 크게 놀라 그간의 사정을 물어보더니 장판수와 윤계남을 꾸짖었다.

“네 이놈들! 아무리 세상이 무심했다고 하나 이토록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니! 어찌 이리 어리석을 수가 있더냐! 지금 당장 갑사에 입격되었다는 증서를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가거라! 거기에는 너희들이 할 일이 있을 것이니라.”

증축된 남한산성에는 이를 지킬 병사와 갑사의 수를 충당하기 위해 분주했다. 선조 때의 임진왜란에 이어 광해군 때 강홍립의 출전, 인조 초기 이괄의 난, 정묘호란으로 이어져 가며 조선의 군대는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적이 쳐 들어왔을 때 과감히 나가 싸우기보다는 성을 쌓아 지키며 상대가 지쳤을 때를 기다리는 전술에 더욱 매달렸고 북쪽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서는 요새로서 남한산성이 증축된 것이었다.

남한산성으로 간 장판수와 윤계남은 마침내 갑사가 되어 수어사 이시백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되었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다. 특히 나이도 어린데다가 평안도 말투를 쓰는 장판수가 지시를 내리면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대들고는 했다.

장판수는 처음에 이를 참았지만 결국에는 화를 참지 못하고 목검을 들어 병사들을 후려치곤 했다. 이에 병사들의 놀림은 그쳤지만, 장판수 위에 있는 부장이나 종사관들의 놀림과 무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연히 장판수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속을 터놓고 지내는 이는 오직 윤계남뿐이었다. 그나마 윤계남마저도 올해 초 개운치 않은 기분을 안고 평양으로 떠나가버렸다.

“홍명구 영감께서 평양감사로 부임하셨다 하네. 그간 한양으로 데려와 무과와 갑사 취재를 보게 한 이들을 데려가려 해서 떠나게 되었네.”

윤계남은 바로 전날에야 평양으로 간다는 실토를 했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이 없던 장판수는 그날 저녁 술을 잔뜩 퍼마신 후 목검을 두개 들고서는 윤계남을 소리쳐 불렀다.

덧붙이는 글 | '사금파리 부여잡고'는 설날연휴로 인해 14일에 계속됩니다. 풍요로운 설날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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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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