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은 대전 시내 남단에 마치 안방마님처럼 앉아 있다. 높이 457.6m에 지나지 않는 이 나지막한 산은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를 품고 있다.
보문산의 정상 시루봉에서 배나무골로 내려가는 남서쪽 골짜기에는 보문사지라는 폐사지가 있다. 그 절이 언제 창건 되었는지, 어떻게 폐사의 운명을 겪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고려시대로 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폐사지에 대한 나의 원초적 추억
내게는 폐사지에 대한 원초적 체험이 있다. 1976년 광주호가 담수되면서 우리 고향 마을 48 가구는 수몰되었다. 동네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탑골 논 가운데 서 있던 보물 제 111호 개선사지 석등은 여전히 고향땅을 지키고 있다. 석등의 창과 창 사이에 있는 공간에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년)에 만들었다고 명문화 되어 있으니 천년도 훨씬 넘게 마을을 지켜온 석등이다. 이 석등의 8면에는 8개의 화창(火窓)이 나 있다. 창의 크기를 직접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가로 20cm 세로 30cm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동네 친구들과 석등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 내기를 걸었다(내기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석등 안으로는 쉽게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머리를 이리 들이밀고 저리 들이밀어도 보지만 도무지 석등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자 어린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대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스런 감정이 엄습해왔다. 석등 밖에 있는 동네 아이들도 어찌할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거짓말 처럼 머리가 먼저 빠져나왔다. 석등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벌써 수십 년이나 지난 옛 일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털이 쭈뼛해진다. 내게 있어 폐사지란 그만큼 익숙한 풍경인 것이다.
모가지가 짧아 슬픈 보문산 마애여래좌상
새해 둘째 날(10일) 오후, 한가한 틈을 타 보문사지를 찾아 나섰다. 조금 에돌아 가는 듯하지만,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난 후 보문산성을 거쳐 보문사지로 가기로 했다. 석교동 복전암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1km 쯤이나 올라 갔을까. 마애여래좌상이 약간 뚱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마치 "여긴 웬일이야. 먼 데로만 돌더니…" 하는 듯싶다.
마애여래좌상의 크기는 광배 포함해서 높이가 약 3.2m, 얼굴의 길이는 80cm, 무릎의 너비가 2.3m이다. 눈을 가늘게 내려뜨고 있고 목이 짧다. 머리는 나발 위에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통견의 법의를 걸쳤으며 오른 손은 가슴 앞에 들었고 왼손은 배 위에 얹었으나 수인은 마모되어 뚜렷하지 않다.
마애여래좌상의 배웅을 받으며 보문산성을 향하여 산길을 오른다. 오늘 따라 겨울 숲이 더욱 적막해 보인다. 적막에 지친 생강나무니 철죽이니 떡갈나무 같은 작은 관목들이 바람이 부는 쪽으로 귀를 갖다댄다. 쏴르르르… 바람 소리마저 살갑게 느껴지는 그런 오후다.
보문산성의 북서쪽 성벽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조급증을 낸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보문산성이 바로 지척에 다가온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보문산성
보문산성은 표고 406m 지점에 위치한 태뫼식으로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산의 정상인 시루봉보다 약간 동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시계가 활짝 트였다. 산성의 평면은 남동→북서 방향을 축으로 하는 긴 타원형 모양이며 수평 길이로 따지면 성 둘레는 약 280m에 달한다.
성체는 대부분 화강암계의 자연할석(自然割石)을 이용하여 석축했으나 급경사진 동북벽은 천연지세 그대로 놔두었다. 문지(門址)는 서문지와 남문지 두 군데가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북벽에 붙여서 설치한 서문지로 많이 드나든다.
장대루(將臺樓)에 올라가면 대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시계가 좋다보니 계족산, 식장산 등 인근의 여러 산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이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산성을 내려와 왼쪽 길로 접어든다. 시루봉은 여기서 950m 쯤 가야 나온다. 명절 끝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 산행객이 많다. 시루봉에 올라서니 거기도 역시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보문사지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옥계동 쪽으로 난 산등성이를 따라간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이 갈라지는데 보문사지 가는 길은 골짜기로 내려가야 한다. 20여 분쯤 내려가면 길이 또 갈린다. 이정표가 없다고 해서 망설일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많이 다닌 흔적이 있는 길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갈참나무들이 줄 지어선 고요한 숲길이 한 동안 이어진다.
폐허다운 폐허, 아름다운 페허 보문사지
조금 가면 개울이 나오고 개울을 건너면 거기서 부터 바로 보문사지가 시작된다. 보문사지 터 맨 아래 평지에는 너른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마치 울음을 삼키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한 억새 무리들이 폐사지의 쓸쓸함을 고조시켜 준다.
가장 먼저 객을 반겨주는 것은 돌확과 석조이다. 석조는 길이 210cm, 너비, 170cm, 높이 80cm, 돌의 두께는 20cm인 장방형의 물통이다. 밑바닥은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고 앞쪽 바닥에 배수 구멍이 나 있다. 또 남쪽 앞으로는 주전자 꼭지 모양의 주구(注구)가 삐친 어린애 입 마냥 튀어나와 있다. 맷돌 1기, 물레방아 확 2개, 세탁대가 버려지듯 남아 있다.
여기선 기와와 도자기 조각과 같은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데, 주로 조선시대의 유물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보문사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이다.
보문사지 터는 동서로 약 70m, 남북으로 약 50m 가량의 크기이다. 남향한 경사면에는 계단식으로 3단의 축대를 쌓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일 아랫단에 1개 所, 중간에 2개 所의 건물터도 보인다.
주춧돌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축대 바로 밑에 한쌍의 괘불지주(掛佛支柱)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윗단은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괘불지주는 높이 90cm, 1변의 길이가 16X35cm의 간격으로 두 짝이 마주 서 있다.
보문사지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 이곳이 여간 세가 큰 사찰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인 <도산서원지(道山書院誌)>에는 보문사, 동학사(東鶴寺), 고산사(高山寺), 율사(栗寺) 등에서 승병을 동원하여 서원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문사가 승병을 보낼 만큼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절 터 한 가운데는 마치 대금처럼 구멍이 뚫린 오동나무가 두 세 그루가 있다. 이 구멍을 판 딱다구리는 전생에 수도승이었던 것일까. 적적한 폐사지에서 딱다구리는 홀로 딱딱따악 마치 목탁을 두드리듯 구멍을 판 것이다.
이곳 보문사지는 폐사지라면 흔히 가지고 있는 탑 하나, 석등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완벽한 폐허다. 그러나 절 터 맨 위에 자리한 꽤 너른 시누대 숲과 절터 맨 아래 쪽에 펼쳐져 있는 억새숲이 어울려 이 폐허의 절터에 숨결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새삼스럽게 복원(復元)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의 상태로 돌린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에 속하는 일이다. 제 아무리 원형 대로 복원하고 보존한다 해도 건축 당시의 기능과 의미까지 되살려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우리 나라에는 폐허다운 폐허가 많았으면 좋겠다. 사랑하고 싶은 폐허, 사랑할 수 있는 폐허가 많아서 시인들은 거기에서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얻고 또 화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자극받아 불멸의 명화 몇 점을 남긴다면 폐허는 제 본분을 다한 셈이 아닐까.
허물 많은 우리 인간들이 폐사지에서 배울 것은 한가함과 맑음이다.
片雲生晩谷(편운생만곡) 조각구름 느지막이 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霽月下靑岺(제월하청령) 새치름한 달은 푸른 뫼에 지누나
物物本淸閒(물물본청한) 모든 것이 맑고 한가한데
而人自撓心(이인자요심) 사람 제 스스로 분주하구나.
조계종 초대 종정이셨던 방한암선사의 선시 몇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서두르는 자는 언젠가 돌부리에 채이게 되는 법이다. 날이 점점 꾸물럭거리고 싸래기 눈이 날렸다. 사람은 서두르지 않건만 눈발만 제 스스로 분주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