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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19년>
<옥중 19년>
여기 불길이 있다.
그것은 따뜻하다,
나는 따뜻하고
온몸이 편해진다.

하늘에 새 불빛을 칠하는 것은
이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
증오가 불타오른 그 모든 날,
그 어둠이 푸름을 가린 그 모든 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날, 검은 연기가 고요히 소용돌이칠 때
이 사람은 하늘에서 행동을 보살펴준다.

여기 불길이 있다.
뜨겁다
나는 타오르고 온몸에 기운이 솟구친다.

이 사람이 팔을 벌려 이끈 것은
침묵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의 두 눈의 힘이 하늘에 번져 있듯이
말의 힘은 공기 중에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공기중의 연기를 깨끗이 태우는 동안
참을성 없는 기다림의 시기가 다가든다.

여기 불길이 있다, 어떤 감옥도
이 사람의 온몸에서 죽일 수 없는 불길, 그리고 그것을 나는 XXX에게서 본다.


이 시는 한때 영국에 망명했던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민족회의 소속 시인이 쓴 작품이란다. 이 시 맨 마지막의 'XXX'는 당연히 만델라다.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만델라의 28년은 우스울 정도로 긴 세월을 구금 당한 장기수가 너무 많다. <선택>이란 영화로 대중들에게 소개된 김선명 선생의 경우는 45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어쨌든 이 시는 만델라를 노래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지만 싯귀절 하나 하나가 <옥중19년>의 필자 서승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불이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서승이라는 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 바로 불이기 때문이다.

1971년 3월 6일, 2년에 걸친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토집에서 겨울방학을 보낸 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서승은 보안사로 잡혀간다. 당시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정권은 간첩단 사건 하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사건의 주인공으로 서승을 지목한다.

서승이란 교포 학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하나의 각본을 짜는 것이다. 만약 서승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 각본을 받아들인다면 각본을 짰던 그들은 어딘가에서 미소를 띄며 의기양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승은 그러지 않았다. 심문관과 감시병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서승은 겉옷을 벗어 버리고 난로의 경유를 온몸에 뿌려 불을 붙였다. 살아서는 도저히 고문을 이겨낼 수 없는 데다 그들의 각본대로 자신이 짜맞춰져 가는 것에 대한 양심의 불길이었다.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육신이 타들어간 채 19년을 옥살이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는 고통이 따라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향공작'이었다. 전향이란 정치범들에게 이전의 사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상, 다시 말해 국가가 강요하는 사상으로 바뀌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어찌 보면 서류 한장에 지장 한번 찍으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 생명을 얻는 대신 자신을 파는 행위다. 많은 전향 정치범들이 양심의 가책과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못했다는 모멸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폭력과 강제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그의 사상과 정견이 어떠하든 간에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면 당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참 가슴에 남는다.

이 책에는 필자인 서승 외에도 무척이나 많은 장기구금 비전향 양심수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혹독한 전향 공작을 이겨내는 과정이 담담히 그려진다. 단지 글 몇 줄로 그려지는 그들의 몸부림을 보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절로 숙연해진다.

사람마다 저마다 꾸는 꿈이 있고 저마다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 그러나 분단된 이 나라에서는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소에 갇혀 있던 수많은 장기구금 양심수들이다.

서승의 <옥중19년>이란 책을 읽으면서 꿈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이 나라의 현실에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내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에 대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한다.

나처럼 나약한 인간이 끔찍한 폭력 앞에서 날 지켜낼 수 있을까 스스로 묻는다면, 역시 자신은 없지만, 그런 이들이 우리의 과거에 있었기에, 오늘도 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제 개인홈피에 실었던 글입니다.


옥중 19년

서승 지음, 진실의힘(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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