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 공화당원을 비꼬아 부르는 최신 별명은 바로 '신생아주의자(natalists)'다.
부시 대통령을 지지한 미국 중남부의 소위 '빨간 주'의 출산율이 케리 후보를 지지한 동서 해안지역의 '파란 주'에 비해 눈에 띄게 높은 것으로 드러나자 이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뉴 아메리카 재단의 필립 롱맨 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부시 후보를 지지한 주는 케리 후보를 지지한 주에 비해 평균 출산율이 12%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워드 딘이 주지사를 지냈고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버몬트주의 경우 가임 가능한 여성 1천명 당 출산율은 49명이었다. 이에 반해 무려 71%가 넘는 표를 부시 대통령에게 몰아준 유타주의 경우 거의 두배에 달하는 91명의 출산율을 보였다.
미국의 새로운 유행어 '신생아주의자'
스티브 세일러는 <아메리칸 컨서버티브>에 기고한 글에서 "출산율이 높은 미국의 상위 26개 중에 무려 25개 주를 부시 대통령이 싹쓸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 미국 대선을 좌우한 가장 핵심적인 변수가 바로 유권자의 출산율 지표였고, 자녀를 3~4명 이상 가지는 것이 보통인 공화당 지지자들의 몰표가 부시 승리의 결정적 변수였던 셈이다.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자녀들에게 대물림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임을 감안한다면, 민주당 후보는 해가 갈수록 집권가능성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이 문제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마치 1992년 우리나라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호남에 비해 압도적으로 다수인 영남의 유권자를 바탕으로 김대중 후보에 승리하자, 호남 유권자들 사이에 유일한 승리의 길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밖에 없다는 푸념 섞인 한탄이 만연하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공화당 지지자들은 영화관람이나 외식, 해외여행, 승진 등에 들일 시간과 돈을 희생해, 이를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데 모두 쏟아붓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영적, 정서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삶의 다른 무엇보다 가정을 관리하는데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지적이 옳다면 공화당원들의 출산율이 높은 것은 소위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이들 지역의 유권자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드높은 것이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가정에 충실한 신도가 축복을 받는다는 기독교적 신념에 가득한 이들 공화당원은 출산율 이슈가 대선 이후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자 여성의 낙태권리를 지지하는 민주당원들이 자녀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공화당 지지자가 많은 주는 왜 출산율이 높을까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이 주로 대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고학력 계층인 반면, 공화당원들의 거주지가 교외지역이거나 소위 '마이크로폴리탄'이라 불리는 신흥 준도회지역인 것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출산율 격차를 만들어낸 결정적 차이가 바로 주택문제에 있다고 지적한다.
땅값 비싸고 살인적인 생활비에 시달리는 대도시 지역의 유권자들은 값비싼 양육비와 주택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다. 반면 값싼 교외지역에 넓은 땅을 확보해 큰 돈 들이지 않고 여러 개의 침실을 지닌 큰 주택을 소유할 수 있는 계층은 아무래도 자녀를 많이 갖는데 부담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이들 지역에서 기독교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교파가 발흥하는 것을 우연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마이크로폴리탄 지역 573개 중에 무려 474개 지역에서 부시 대통령이 승리를 거두었다.
집이 넓어 여러 개의 침실을 가지고 있고, 차고 역시 널찍해 주말이면 차를 정비하거나 집안을 돌보고 수리하는 것이 취미인 교외지역의 거주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체인점이 바로 홈 디포라는 건축자재 유통점이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홈 디포는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퇴역한 예비역 장병들을 대거 채용해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채용한 10만 명의 신규 직원 중 10분의 1 이상을 참전용사들로 채웠다.
건축자재 유통점 홈 디포를 통해 본 미국사회의 보수화
홈 디포가 참전용사를 선호하는 것은 전장에서 훈련된 지휘력과 전략적 사고가 고객들을 응대하는데 있어서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집 고치기를 낙으로 삼는 홈 디포 고객의 태반이 바로 공화당 지지성향의 보수적 유권자들이기 때문이다.
홈 디포는 예비군으로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자사 직원의 대형사진을 걸어놓고 성조기 문양으로 매장 곳곳을 치장하는 등 소비자들의 애국주의 성향을 적극 부추겨 매출 신장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부시 대통령 역시 지난 임기 중 연두경제연설의 장소를 홈 디포 매장으로 선택해 이 건자재 유통업체와 공화당 지지자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과시하기도 했다.
갈수록 치솟는 양육비가 두렵고 아이의 공부방까지 갖춘 넉넉한 집을 구할 수 없는 대도시 거주자들은 자연스럽게 아이 가질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대도시에서 좋은 집을 구하려면 맞벌이가 필수인데 이들 맞벌이 여성에게 양육의 부담처럼 큰 고민거리가 또 없다. 결국 자연스럽게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게 마련.
대도시와 교외지역의 양극화에다 바이블 벨트가 겹치고, 이것이 결국 출산율 격차로 이어지면서 미국 사회의 보수화 흐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는 형국이다.